♧ 참나리꽃 - 오승철
달팽이 뒷간 같네
신제주 어느 골목
어찌어찌 해장국집 끌고 온 내 아내가
얼결에 씨도둑처럼 참나리 꽃씨 받아왔네
여름이면 화분에 슬그머니 올린 꽃대
잎새마다 까만 씨앗 하나씩 품어내어
어디다 내려놓을까
시멘트 바닥뿐인 걸
그 꽃씨 다시 받아 어딜 갔나 했더니
장모님 산소 곁을
불 지르고 있었네
철 이른 벌초를 와서
불 지르고 있었네
♧ 내 뺨을 쳐라 - 문순자
첫 수확 감귤밭을 어떻게 알았을까
‘링링’ ‘타파’ ‘미탁’ 그리고 ‘하기비스’
이름도 낯선 태풍들
번갈아 다녀간다
크든 작든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지만
생색내듯 서너 됫박 햇살은 못 보탤망정
어린 것, 그만 흔들고
차라리 내 뺨을 쳐라
♧ 수국 – 조영자
왜 하필 장마철이니?
그리고 웬 고봉밥이니?
4․3에 누굴 보내고
혼자 사는 저 종부宗婦
까마귀 모른 제사상
수북수북 퍼 담았네.
♧ 수선화, 괴다 - 김신자
그리운 이름 하나 땅속에 묻었다
건듯 부는 바람이 뭇별을 건너와서
담벼락 기대 앉아서 그대 얼굴 그린다
꽃 필 날 기다리며 사랑 하나 심었다
세상에다 그리움 한가득 들어차면
그 사람 바튼 숨으로 달려나와 줄까요
해와 달이 번갈아 수없이 날 밀어내도
꽃봉인 듯 가만가만 기다려 있을게요
찬바람 휘몰아쳐도 장승처럼 버티며
괸다는 건 그 사람의 온기를 데우는 일
바람이 물고 있는 떨림도 다 읽으면
어쩌면 내 가슴 왼편에 괴어 있을 수선화
♧ 슬그머니 – 강현수
한사코 외면하며
싱가폴로 떠난 내 딸
6년 만에 탕아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감염병, 등 떠밀려서
슬그머니 돌아왔다
♧ 봄 – 김영순
서귀포 사공원에 누가 자꾸 버리나
봄까치꽃 괴불주머니 그리고 뚜껑별꽃
도대체 무단투기를 누가 허락하였나
♧ 인연의 첫 문장 - 이명숙
연인의 몸에 찍힌 천의 입술흔 너머 노을을 되작되작
울먹이는 등성이
꿈엔들 그날이라면 곁자리 선뜻 내줄 일
농담처럼 요요한 땅은 꽃의 성지라 붉은 달빛 선율에
귀가 폴짝 서는 밤
당신의 식욕을 위해 고양이가 돼볼 일
샹송처럼 말랑한 라르고로 흐르는 옛사람 현상하면
꽃빛 한겻이라도
그 순간 영원하리니 눈 감아도 좋을 터
♧ 신흥사 참새 - 김양희
봉우리 탄 구름이며 대웅전 인 바람을
큰스님과 경작하던 신흥사 참새들은
영전에
올릴 거라고는
지저귐 그뿐이라
스님 영결식에도 추모 다례제에도
새끼들 주둥이에 애벌레를 물리며
절 마당
흥건하도록
지저귐을 올리더라
* 정드리 문학 제9집 『내게도 한 방은 있다』(다층,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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