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잊어라 - 양영길
아프리카 우간다에서는
한국 시간을 잊어버려야 했다.
잊어야만 되었다. 시차 적응을 위하여
아침 6시는 한국 시간 낮 12시
낮 12시는 한국 시간 저녁 6시
우리가 봉사활동을 마치고 캠프로 돌아오는
저녁 8시는 한국 시간 새벽 2시
우리들이 서로 말 섞으며 술잔을 치켜들던 시간에
우간다에서는 새벽 닭울음소리가 시작되었다.
시간을 잊으면서
한국 가족들과의 소통도 잊어야 했다.
새벽 2~3시에 한가한 소리로
잠을 깨워서는 결코 안 되었다.
‘6시간’ 이라는 시차
마음을 비워야만 시차 적응이 되는데도
잊으려고 애쓸 때마다 되살아나는
한국 시간의 그리운 얼굴들
그 때 그 크게 웃던 웃음소리들
자고 일어나던 오래된 시간도
먹고 놀던 진한 시간도
잊어야만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그러나 우간다 쿠미의 초가집들과
끝 모르게 길게 뻗은 붉은 흙길과
아이들의 호기심어린 큰 눈망울과
꾸밈없는 웃음 너머
가난과 불안의 씨앗인 그 폭력의 역사들은
잊어서는 안 되는 아프디 아픈 시간이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시간이었다.
♧ 삶을 태우는 시간 - 오광석
가시리 오름을 타던
열아홉 시린 겨울
소개된 집터에
어머니 아버지를 묻은
앙상한 봄날
뜨거운 태양 아래 물질하던
청춘의 여름날들도
분가하는 자식들을 보며
아픈 무릎을 주무르던
주름진 가을도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재가 되어 간다
삶을 태우는 단 두 시간
남는 건 작은 목함 하나
고개 숙여 눈을 감는다
삶의 한 계절들을 잘 살았노라
고모의 목소리가 들린다
♧ 제주 동문시장 - 이종근
산지천(山地川) 좌우의 굽은 질서 속으로
관조적인 흥정이 무질서로 분주히 오간다
푸른 제주항 가까이 부딪히는 고깃배의 고동처럼
소리 맑은 갈매기 떼의 집결을 호소하는
호루라기 개시와 중얼거리는 수신호
그 밀고 끌어당기는 다부진 힘,
그들이 방금 낚은 활어를 꽉 다문 갈고리로 물어다가
싱싱한 횟감으로 자유처럼 풀어놨다
수족관에 머물 겨를 없이
식객들이 든 젓가락이 줄줄이 입맛을 다시는
아주 끈질긴 힘,
아, 섬과 바다를 경계하는 퀭한 박력이랄까
이와 곁들여 오메기떡 한 점 할까
흑돼지 삼겹살이나 족발을 주문할까
은빛 갈치나 옥돔을 석쇠에 올려 구울까
한라봉과 천혜향은 어찌 구분할까
배고픔은 인정으로 이미 가신 지 오랜데
관조적인 흥정에만 아직도 매달리고 있다
♧ 붕어빵 연못가 – 조직형
노란 붕어들이 퐁퐁 물 밖으로 튀어 오르는
연못가 낡은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꼬물고물 할머니들
펄떡이는 붕어를 낚아채 한숨 돌리곤
꼬리를 쥐고 머리부터
오물오물 달게도 먹는다
수없이 튀어오르는 붕어들
그물 가득 채워지는 만선의 추억에 푹 잠겼다
털고 닦고 노랗게 바싹 잘 익어서
다시 한 번 거스러미 훑어 매만지는 손을 떠나
봉지 봉지에 담겨
분가하듯 떠나가는 붕어 붕어들
♧ 이중섭 – 현경희
오늘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누군가와 시선 맞추는 그
짙은 검은색 머리에
살짝 올라간 눈썹
광대뼈 가까이 올라간 입꼬리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미소
다시 보게 돼 반가운 양 오늘은 더 활짝 웃는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하얀 벽만 바라보는 남자
타인의 사랑을 먹고 사는 남자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남자
그 남자의 웃음이 얄밉다
매번 만날 때마다 실연을 주는 남자
그 옆엔
그를 닮은
붉은 소
한사코
앞을 가로 막는다
♧ 소나기 - 현택훈
자전거 타고 가던 사람이 자라목을 하고 지나갔다
서점 가는 길에 소나기가 내렸다 차양 넓은 가게로 몸을 피했다 그곳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빛나는 가게였다 모두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자라목을 하고 지나갔다’가 마음에 들었다 얼마냐고 물으니 쿠키 한 봉지라고 한다 나는 마침 손에 쥐고 있던 쿠키 한 봉지를 내밀었다 주인장의 가슴에는 명찰이 있었는데, 그 이름표에 붙은 이름이 ‘김지희’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고 잠시 생각했다 문장을 사고 나오니 어느새 소나기가 그쳤다
* 계간『제주작가』 2021년 봄호(통권 제72호)에서
* 사진 :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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