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삼자리
산 사람들이 산삼을 찾아가는 기록은 없다
약초꾼이나 나물꾼이 우연히 해발 낮은 산 능선에서
산삼이 발견되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삼자리가 된다
높은 준령 혹한을 이겨낸 산삼은
심마니의 입에서 몸으로 전해진 해발 천고지
삼 자리, 기가 약한 사람은
그곳에 갈 수가 없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화전민이 된 사람 중, 풍수와
산의 방향을 읽는 사람은 심마니가 되었고
근기가 약한 사람들은 밭을 일구며 살던 자리에서
몇 십 년 된 산삼이 간혹 발견된다
강원도 전역에서 산삼이 나오지만
점봉산이나 오대산, 가리왕산이나 백두대간의 준령 구름이
습기를 조율해 주는 명당의 자리여야 한다
북동쪽 음지는 음력 4월까지 눈을 이고 있다
그곳에서 혹한의 추위와 싸워 이겨내야만 봄햇살로 살아난다
극치의 음이 양의 기운이 되어야 산삼은 사람과 같이
음과 양을 가진 영초가 되는 것이다
전생의 공덕이 많은 사람은 우연히 산삼을 먹게 되고
전생의 업보가 많은 사람은 혹한 겨울산을 지고 산다는 전래는
이제는 공염불과 같은 시대에서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그래도 산은 병을 가진 사람들의 위안의 자리에 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인데
해발 낮은 곳의 삼과 높은 봉우리에서 나는 삶은 사뭇 다르다
산삼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심장과 폐가 약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심마니들의 전래 같은 것
그 높은 산의 산삼자리를 얻으려면
많은 보시와 명상과 발품을 팔아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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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시집 『바람의 상처를 당기다』에서 「산삼자리」를 재구성하여 실었다.
♧ 오대산 조갯골*
산길을 돌고 돌아 돌제단 기도터를 지나는 저녁
산골짜기에서 사그러진 북극성이
산에 든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면
사람들은 산속 연화장 세계로 온 것이라고 믿었다
까닭 없이 몸이 아프거나 얼굴에 핀 검은 반점과
폐를 다친 사람들은 이곳으로 찾아와 기도하고
희귀한 약초로 밥을 지어 먹으면 몸이 낫는다고 믿었다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지만
한번 그곳에 가면 시끄럽고 번잡한 세월 잊고
산 아랫마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산에 들어 기도하는 힘이 부족하여
문수보살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는데
눈개승마 핀 언덕에서 소 타는 꿈을 꾸면
심마니가 산삼을 점지받기도 한다는데
그래도 슬픈 나무들이 중생의 그림자를 지나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북극성이 뜨지 않겠지만
하늘은 늘 인연에 기대고 사는 곳
지금은 심마니 약초꾼 석청꾼들이 한 계절을 살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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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산 조갯골은 북대산에서 한나절 가야 겨우 갈 수 있는 계곡이다. 희귀한 약초와 산삼이 간혹 나기도 한다.
♧ 그림자 지우기
오대산으로 첫 시집을 보내준 사람 연락이 없다
지리산에서 우전차를 보내온 사람
금강경 시절 인연을 외우며
어린 당나귀 꼬리에 부서지던 햇살을 따라
함께 넘은 옛사람들은
다들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연락이 없다
높은 산 눈 녹은 물소리가 잠든 나무 이파리로 필 때
하늘의 중심을 잡고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던 차마고도 길
마음과 삶은 길을 이어놓았는데
나는 잃어버린 것도 없이 어느 사람을 연민하다가
이곳까지 왔을까
바람에 팽팽해진 나뭇가지로 날아온 새들이 울고 갈 때
마음의 심지 올린 봄날이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허공에 잎을 꺼내놓은 고산의 나무들은
서로의 간격을 줄이며 피고 있었는데
♧ 오대산의 가을
서릿바람 풀어 놓은 골짜기 나뭇잎들
색채는 점점 짙어져 마을로 내려오고
여름을 건너온 새들 소리는 고요한데
산밭에서 일하는 아내는 푸른 별의 행방처럼
가을로 물들었다
산속 중심으로 보름달이 뜨면
아내는 아이가 생기길 바랐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나는 서리 맞은 배추밭에 멍하니 서서
날아가는 나비를 한참 바라보았다
♧ 오대산
- 다람쥐눈물바위*
하늘이 물길을 열자
이윽고 가파른 바위들이 몸에 와 닿는다
푸른 나무들이 소실점 위로
북쪽 별들이 뜨는 계절의 종착지이다
여름엔 숲에 싸여 보이지 않지만
다람쥐들이 도토리나 산밤을 저장하고
경사가 심한 바위에서 울며 먹던 그들의 은신처이다
몸속 어디선가 버리지 못한 말과
꿈속에서 병이 된 몸을 물속에 두고
바라보며 머물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사람들 속에서 몸에 병을 얻으면
바위의 기운을 받기 위해 며칠을 기도하고
가슴에 주먹만 한 울음을 토해내며
미워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했다는 그곳엔
이제 다람쥐들이 주인이 되었다
나는 지금 여름의 별들이 가을의 방위에 들기 전
약초꾼들의 푸른 장지가 되기도 했던
그곳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내내 어떤 사람이 문수보살을 부르며 울었다는
이 바위는 언제부터인가 사냥꾼에 총을 맞은
산짐승들이 찾아 쉬게 되었는지
여름의 별자리 길이 바뀌려는지
천둥 번개가 빗소리를 건너고 있다
사수자리별들이 잘 전망되는 가을의 입구
다람쥐들이 입 안 가득 도토리와 밤을 물고
몸을 흠뻑 적신 채 바위를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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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눈물바위 : 경사가 심해서 다람쥐들이 먹이를 숨기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오른다는 오대산의 바위.
♧ 젊은 날의 유산
- 아우에게
도시의 차가운 귀갓길은 지금도 회유해보지만
검은 옷을 비집고 나오던 그대의 상처들은 그날이나 지금이나
이 산에선 그저 섞고 피고 지는 일인 뿐
아무것도 아니라네
북오대 가는 길 상원사 갈림길 월정사 가는 길
쌀쌀한 바람을 밀며 그대 뒷모습 같은 산 그림자를 지나간다
한때 높은 산 가기를 염원했던 그대 정신이 오르던 산처럼
불길한 예정이 올 걸을 알면서도
봄 산은 구름처럼 옷을 갈아입고
허공에 핀 별처럼 산에선 그냥 온 길을 가고 있을 뿐
한참 후에 되돌아온 싸늘하게 식어버린 돌에 눌린 풀퍼럼
그대가 험한 산을 돌고 온몸과 허름한
등산화를 허공에 걸어주고
빈 그림자 위 고산병처럼 살던 기억들도
지금은 다 흘려보냈다네
그대가 정해놓은 높은 산을 나는 가지 않기로 했지
한낮에도 치명적으로 빛을 내던 그대의 눈빛에 길을 잃어버리고
계곡 합쳐진 물소리를 듣다가
나는 이곳 오대산에 와서 살기로 했지
젊은 한 시절 같이 저녁밥을 먹고
그대는 이국의 설산으로 떠나던 날을 지금도 기억하지
나는 오대산에서 자식도 얻었고
글 쓰는 것을 잘 이해하는 아내와 잘 살고 있지
달빛에 그을린 털 없는 새처럼 잘 울지도 않고
몇 해 전부터는 슬픈 감성과 감각을 불러 시를 쓰며
바람의 산길로 몸을 이동하며
산나물 농사로 생계를 삼고 있다네
먼저 높은 산의 그림자를 밟고
사는 것을 이제 믿지 않기로 했다네
높고 낮은 산처럼 엇갈린 운명을 사랑했던 그대는
어디로 가서 살고 있는지
부디 고운 물결을 넘어 산으로 살고 싶었던
그대의 생도 낮은 산에서 다시 바라보기를
*윤병주 시집 『풋사과를 먹는 저녁』(현대시학 시인선 060, 2020.)에서
*사진 : 오대산 답사 사진(2017. 7. 2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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