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들도 슬프면 그림을 그린다
어둠은 그리움의 도화지
쏟아질 것 같은 눈물로
그립다는 말 대신
그림을 그린다
별들이 뿌리는 눈물
별이 된 동생의 슬픔을 달래려
가만히 옆에 와
함께 울어주는
먹먹한 어둠일 때
눈물을 흘리며
그림을 그리는
별
♧ 인생의 방파제
지나온 저 먼 길 가쁘게 살았구나
바다를 바라본다
방파제 끝에 서서
풍덩 빠지는 죽음 같은 삶
팔 뻗어 돌아오는 고깃배 품에 안고
하나씩 매어두면
꾸벅꾸벅 잠이 든다
끝까지 사랑한 사람
이름 부르며 바라본 그 끝
방파제 끝에 서면
잊었던 그 사람들
하나 둘
그리움이 뼈 속까지 아리다
다시는 보내는 일이 없어야지
아무도
♧ 지갑이 돌아왔다
일년 만에 지갑이 돌아왔다
내용물은 다 빼앗기고
몸만 쭈굴쭈굴하게 돌아왔다
살만한 곳이 없었나
돈과 카드와 친구들 연락처
모두 빼앗기고
앙상한 모습이 되어
몸만 돌아왔다
다시 당신과 살아보겠다고
망신창이가 되어 나타난 거다
가득 채워 줄 거다
단단하게 뻣뻣한 카드로 주름을 펴 주고,
홀쭉한 몸을 두둑하게 돈으로 채워줄 거다
온몸을 깨끗이 닦아
매일매일 데리고 다닐 거다
♧ 참, 따뜻하다
목티에 조끼까지 입었다
속옷 위에 목티
목티 위에 조끼
다음은 외투였다
밖에서 보면
외투가 조끼를 감싸고
안에서 보면
속옷이 외투를 감쌌다
속옷을 잘 펴려고
손을 집어넣는 순간
참, 따뜻하다
내 몸이 외투까지 체온으로 덥혔구나
외투가 바람을 막고,
목티가 체온 지키며
서로가 위하고 감싸주며
더불어 산다는 것
따뜻하다
참
♧ 바닷게
굴삭기 같은
바닷게가 기어간다
옆으로 옆으로
게거품을 뽀글거리며
동료들과 함께
집게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높은 데를 낮추고
거친 바닥을 평평하게 다지도록
물러서지 않은 게들이
투지
위험이 닥치면
집게발을 뚝 잘라버린다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자존심쯤이야 이런 아픔쯤이야
참아야 하는 것
나는 언제
내가 지켜내야 할
가족을 위해
옆으로 기거나
팔다리를 잘라내듯
희생을 해 봤는지
헤아려 보는데
♧ 金아기, 李아기
희생자 묘비명이
金아기 李아기
이름을 짓지 못한
姓이 다른 아기들
이름이 같은 아기들
묘비명이
金아기 李아기
엄마 품에서 잠들었다고 썼다
엄마 이름 옆에
金아기 李아기라 썼다
교통사고도 아니고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싸운 것도 아닌
누구를 미워해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엄마랑 같이 죽은
金아기
李아기
* 김정수 시집 『따라비로 오라』(시와 실천, 2019)에서
* 사진 : 아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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