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고흐의 자취가 남은 오베르 (2)

김창집 2021. 5. 31. 23:29

 

  반 고흐는 색(), (), 구성(構成)이라는 회화의 근본 요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단지 예술 양식으로서만이 아닌 새롭고 독특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했다. 색은 모든 사물에 생명력을 주는 생명의 숨결로, 선은 생명의 원동력이자 불멸의 에너지를 지닌 운동의 원리로, 구성은 세상에 대한 견해와 감정을 담아내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는 한 인간이자 화가로서 성취와 고독, 그리움과 환멸, 사랑과 혼란, 현실에 대한 애착과 도피, 조화와 무질서,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 지속하는 것과 스쳐가는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가 자신의 그림으로 위로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세상과 사람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런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했고 파멸했다. 그는 색과 움직임으로 가득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담은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 (마로니에 북스 빈센트 반 고흐’. 2020. p.p. 8889)에서  

 

 

벵쌍과 테오에게 - 최범영

   - 밀밭에 서서

 

사람들은 빈센트 반 고흐라 하지만

내겐 벵쌍이란 이름이 더 친근하지

 

주중이면 날마다 오를레앙에서 파리

파리에서 오를레앙을 오가던 때

주말이면 파리 가고 싶어하는 아내와

쉬고 싶어 하는 나 사이 긴장감은

이레 동안 마실 물 사러

슈퍼마켓 가는 걸로 식히곤 하였지

 

공부를 다 마치고 두 이레 동안

우리 가족은 파리 16구 아는 집에 터 잡아

자동차 없이 전철과 버스와 발걸음으로

파리지앙으로 살았던 때

우리 만큼 힘들게 살며 또 서로 아껴주던

벵쌍과 테오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밀을 벤 들판이

벵쌍의 그림 터치로 살아나는 날

오베르 성당 안 어느 여인의 기타 소리가

벵쌍과 테오를 기리는 미사였던 때

나는 내 기도문을 그녀의 방명록에 적었다

 

까마귀 나는 여름날

들판에 서면

웬지 밀려오는 그리움에

벵쌍과 테오가 그려진다

밀을 벤듯

나무단을 막 해온 듯 그려진 곳엔

꽃과 나무와 길이 있었다

 

눈물이 너무 나와

둘이 누워 있는 곳에서 차마 사진 찍는 것조차

죄스럽다는 생각에

멀리 밀밭에서

나는 내 딸 따나와 밀 이삭을 쥐고 멀리서

벵쌍과 테오, 둘의 그림자를 찍어두었지

 

언제나 사람살이는 늘 혼자

그러나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손길로

사랑의 샘이 마르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벵쌍과 테오에게 이 편지를 쓴다

 

---

* 오베르: 오베르 쉬르 우와즈(Aubert-sur-Oise). 파리 북쪽에 있음

 

 

그림 속의 나무 - 지인

 

마침내 돌은 부서지고

한 장의 파란 잎이 무덤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나는 몸을 일으켜

공기와 물과 빛을 빨아들이고

흰 뿌리는 대지의 유방에서

흰 젖을 빨아 올린다

나의 가지와 잎이

하늘을 향해 오르려 하면 할수록

나의 뿌리는 그만큼 땅 속으로 내려간다

내가 바람으로 부는 날

나는 소리친다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든지

차라리 땅 속으로 내려가

썩어 흙이 되고 싶다고

 

빈센트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

그림 속의 나무, 그 곡절을 들여다보노라면

나무는 내 안에 들어오고

나는 나무 안에 들어 가 하나가 된다

흙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

 

 

씨 뿌리는 사람 - 송선애

 

서울시립미술관 고흐전에서

일백 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을 만났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넘실거리는 보리밭을 배경으로

진초록 짙은 꿈을 펼친다

 

링 위에서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여러 차례

끝내, 그는 뇌사판정을 받았다

 

힘차게 날아오르지 못하고

버거운 이승의 끈을 내려놓았다

 

엄동을 딛고 틔운 보리싹 같이

생살 돋아 부식된 세상 걸러내라고,

눈부신 만상(萬象)을 다시 보라고,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지금도 그는 씨를 뿌리고 있다

 

*올리브 재배지

오래된 과수원 - 고경숙

 

물 묻은 대지가 빛을 조절해 반짝이는 모습을

나뭇가지는 턱을 괴고 바라본다

사선의 구도로 엄숙한 교회탑 하나 들어와

원색의 애달픔 더할 때

한가로운 시간

자꾸 발을 헛디디고

보낼 사람 다 보내고 홀로 남은 과수원은

하루에도 몇 번씩 꿈을 꾼다

 

낡은 집은 배경이 부드러워

언덕을 흔쾌히 감싸고

치매 걸린 노인이 거니는

고흐의 산책길에 가끔 바람이 놀러올 때

김 오르는 퇴비더미 헤집어 분뇨 몇 방울 더해놓고

닭 몇 마리 구구구 달아나는,

부스스 꿈에서 깬 나무들

메마른 유두에도

하얗게 수줍은 꽃들이 터지는

 

(반 고흐와 테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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