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알 수 없는
삶의 보폭 사이
쉼표 같은 작은 시어들이
자꾸 밟힌다.
집어 들었다가 놓았다가
놓았다가 또 집어 들었다가
이게 다 뭐라고……
2021년 6월
조한일
♧ 물질일보
테왁을 붙들어야 물 밖이 이승이지
탯줄 탄 숨비소리 조간대 넘어오면
이고 온 망사리마다 주름지는 자맥질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해풍 맞은 노모 가슴엔
바다의 문장들이 절벽처럼 서 있다
오늘 자 물질일보를 물숨으로 넘긴다
♧ 외주外注
시인아,
혼자서 감당하려 하지 마라
11월의 쓸쓸함도 목요일의 피곤함도 내게 맡겨주오 쳐낼 것 다 쳐내고 도로 갖다 주리니 기울어진 운동장을 비탈 같은 심장으로 수평기까지 갖다 대고 애써 일으켜 세우려 마라 불콰한 낯빛으로 폭우 그친 뒤 아침 햇살을 숨죽여 마셔보라 가시처럼 목에 걸려도 눈 딱 감고 삼켜보라 그러려니 삭혀왔던 적 곱씹으며 되뇌었던 적 없는 것처럼 하지도 마라
당신의 시 한 구절에 죽고 사는 나도 있잖아
♧ 형광등을 갈며
세 평 남짓 안방에 불쑥 찾아온 침묵과
햇빛도 몸을 사려 소용없는 밤 열 시 반
빛 잃은 시각과 공간에서 넌 점점 야위어도
켜졌다 꺼졌다 하는 ON OFF의 갈림길에서
낮과 밤 그사이에서 눈 감았다 떴다 한 넌
기어코 살아 있음을 화들짝 보여줬어
새것이 으스대며 꿰차는 낯선 이곳
죽도록 밝아야 죽지 않는 삶이 있어
길고 긴 터널 지나며 눈이 부실 창백한 너
이 순간 수명 다한 널 누군가 밟고 가도
밝은 날 존재감 없이 숨죽여 살았어도
밤하늘 시리우스보다 더 빛나는 삶이었어
♧ 절제의 미
고샅길
철조망 안
말들이 머뭇댄다
오름을 내달리던
고려의
오랜 본능
검객이
칼집에 든 검을
빼다
도로
넣듯이
♧ 젓가락
밥상 위 국물 빼고 다 집어 올린다는
가위처럼 벌어져도 날카롭지 않으며
둘이서 한 몸짓하는 부부 닮은 젓가락
사는 게 서툴러서 비틀대어 속상할 땐
명이나물 찢듯이 삶은 감자 찌르듯이
칼처럼 살기도 하고 송곳처럼 살기도 하고
♧ 다랑쉬오름
단 한 번 끓어올라 지나온 만년 세월
그 흔적 붉은 송이 오름 곁을 못 떠나고
둥글고 아찔한 분화구 모습은 그대론데
한 쪽이 터져버린 말굽 같은 저 사랑도
질펀하게 쌓여버린 원추같은 그 사랑
도반듯한 이런 사랑을 질투하고 있는데
그 후론 두 번 다시 타오른 적 없었다는
화산섬 동쪽 땅에 지독히도 숨을 죽인
제왕의 뜨거운 사랑을 보고 있냐 말이다
*조한일 시집 『나를 서성이다』(시와 실천, 2021)에서
*사진 : 자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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