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월 - 오승철
--장한철 표해록에 들다
납읍천 도끼돌에 꿈이라도 별렀을까
1770년 12월 25일, 못 가둔 그 꿈 하나
기어이 조천바다에 돛배 한 척 띄운다
믿을 걸 믿어야지 뱃길을 믿으라고?
소안도도 유구열도도 들락들락 들락키면
몇 명 또 바다에 묻고 만가 없이 가는 눈발
파도가 싣고 왔지, 청산도에 왜 왔겠나
꿈속에서 물 한 모금 건네던 무녀의 딸
하룻밤 동백 한 송이 피워놓고 돌아선다
그리움도 장원급제도 수평선 너머의 일
나도 야성의 바다, 그 꿈 포기 못했는데
단애를 퉁퉁 치면서 애월에 달이 뜬다
♧ 두말치물 - 문순자
아마 작명가의 작명은 아니지 싶다
퍼내고 또 퍼내도 그만치 차오른다
조천포 발치에 와서
썰물에나 차오른다
아침저녁 유배객들 절을 하는 연북정
무슨 죄목으로 여기까지 내몰렸을까
그 모습 훔쳐보려고
물 길러 온 순덕이
몇 번을 길었다 붓고 길었다 다시 붓고
말 한 번 못 걸어도 사랑은 사랑이다
물허벅 지는 둥 마는 둥
불배나 켜는 바다
♧ 백중날 - 조영자
단 한 치 오차 없이 백발백중 앉았네
원당봉 소나무 숲 곱게 받든 그 가지
허기진
안부를 끌고
백중달이 앉았네.
달아달아 백중달아 기어코 따라온 달아
쉰일곱 해 세경살이, 다 못 한 일 남았는지
이 세상
마지막 노동
양식장에 뜬 달아.
♧ 하도리 순비기꽃 - 김신자
하도리 마을회관 흘러나오는 그 노래
나인 듯 나 아닌 듯 체온으로 녹아들고
구십도 꺾인 허리를 땅속에서 펴신 어머니
어떡하다 여기에 와 바닷가에 앉았나요
파도도 어머니와 아주 친한 걸 보니
어머닌 저 세상에서 꽃몸이 되었군요
오늘은 어머니가 이 세상을 밝혔네
바닷가에 핀 채로 빙긋이 웃으시네
팔 벌려 날 안아주듯 아기바람도 품네
새벽녘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그 소리
나에게 깨지 말라고 살살살 걷던 기척
어머니, 다시 한 번만 그렇게 해 주세요
♧ 벌통생각 7 – 강현수
눈발인지 벌떼인지
허공에 윙윙댄다
벌통도 아버지도
모두 떠난 돈내코
아버지 어디 아파요?
괜찮다며 오는 눈
♧ 하늘 경전 - 김영순
--한곬 현병찬 서실, 먹글이 있는 집
천장 붓글씨들이 여름밤 별자리 같다
남두육성 견우직녀성 새로 생긴 어머니 무덤
서귀포 남녘 하늘에 꼬리별이 또 진다
어느 문하생이 못 다 쓴 고백일까
‘스치면 인연이요 스며들면 사랑이라’
누구의 말씀이신가
별 스치는 이 밤에
개발괴발 살아온 길, 내 길도 파지(破紙)일까
흠들은 흠들끼리 저렇게 어우러져
획 하나 점 하나 놓쳐도
비로소 걸작이 된다
♧ 모르핀 그 아름다운 중독 - 이명숙
눈 뜨면 복용하는 그대라는 비타민 암것도 모르면서 그대를 주사하며
창밖의 시간을 위해 안쪽 시간 견디네
밑지는 장사라며 거짓말을 하면서 서로 다른 유전자 거뜬히 조율하며
모르면 모르는 대로 꽃 지우고 풀리네
봄을 상상하면서 스무고개 넘으며 봄날의 양염처럼 하늘을 애정하며
지상의 못다 푼 숙제 먼지처럼 날리네
* 정드리문학제9집 『내게도 한 방은 있다』 2021. 다층
* 사진 : 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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