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산림문학' 2021년 여름호의 시

김창집 2021. 6. 24. 23:24

나무처럼

 

이 세상 오직 한곳에

깊이 뿌리박고

한 걸음 미동도 못 하면서도

하늘 높은 그곳을 우러러

가지를 힘차게 뻗는 나무처럼

 

여름엔 비바람 겨울엔 눈보라

또 온갖 새들 몰려와

품은 열매 모두 쪼아내어도

말없이 기다리다 봄 되면 다시

새파란 이파리 돋아내는 나무처럼

 

결코 한평생에 살생이란 없다

벌레부터 사람까지 만 생명 품어 길러도

은혜를 갚으라 하지 않고

오직 태양의 은총만을 기다리며

빛이 육신이 된 나무처럼

 

나무처럼, 그 나무처럼

 

상사화 - 김용학

  

봄볕 신록에

싱싱한 잎이 무성하게 올라와

잎으로 꽃밭 만들고 사라진다

 

녹음이 짙어질 때

꽃대 쑥 밀어 올려 피우는 꽃송이

열매는 맺지 못한 채 사라진다

 

잎이 날 때 꽃이 없고

꽃이 필 때 잎이 없어

서로를 엇갈리며 몸꽃을 피워댄다

 

사찰주변에 피는 뜻은

수도에 방해되지 않게

홀로 사는 삶을 위함이라나

 

너 마주하고 있는 난 무엇인가

먼저 간 부모형제 뒤

홀로 서 있는 몸 꽃 하나

 

모두 살아 있던 봄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여름이 지나도록 손 흔드는 상사화

 

그 아름다움에 약속한다

모든 것을 소중하게 감사하며

먼저 내 곁에 있는 모두를 사랑하리라고

 

숲이 돌아왔다 - 김인숙

 

여자는 여름 숲을 가로질러가는 바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슬방울들은 알전구처럼 풀잎을 밝혔지만

식물과 사람은 각각 빛이 다르다는 것을

여자는 몰랐다

 

바람에도 각자 상표가 붙어있고

원산지며 계층이 다르다는 것도

여자는 몰랐다

 

여자가 늙어가는 동안

여자의 몸은 목피木皮처럼 딱딱해져서

태풍이 지나간 흔적만 남았다

가끔 얼굴을 숙이고 울 때마다

송화 가루가 풀썩, 날아올랐다

 

먼 훗날 여자는 주름진 얼굴로

솔향기를 실은 바람을 따라

숲 사이로 비친 햇살을 삼키며

돌아 온 숲에서 길을 찾았다

 

여름 숲 김혜천

 

숲에 들면

 

숨소리도 푸르러

 

굴참나무 몇 그루

 

초록으로 성장聖裝을 한

 

유월의 숲에는

 

산새들 호로롱 영혼을 밝히고

 

정령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

 

숲의 자정自淨에 나를 맡기고

 

핏줄마저 고요해진 정갈한 몸속에

 

암자 한 채 들일 자리 비워 놓아야겠다

 

어젯밤에, 내 방에서 - 오형근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아무리 오래 산다 하더라도 죽게 되어 있다. 그 사실을 피할 방법은 없다.”* 이 구절에서, 페이지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

*제프리 홉킨스, 달라이 라마, 죽음을 말하다(담앤북스, 2019, 117)

 

여름 산 - 전 민

 

첫 여자를 어르듯

여름 산을 탔다

 

속 샛길 옴팡진 계곡마다

숨은 돌, ,

물 돌아 흐르고

 

산새 소리 풀꽃 내음

뿌리박힌 가슴

흐르지 못하여

더 데워진 세월

 

낮달 빠져

차가워진 피

너럭바위 틈새로

되쏘는 빛살

치마끈 푸는 속리俗離

 

여름 산은

바닥난 샘이 아니다

새로 솟는 발견이다.

 

 

                                                   *산림문학2021년 여름 통권 4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