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은 – 정순영
눈이 내리고
꽃샘바람이 불고
겨울을 견딘 늙은 가지에서 매화가 피고
연분홍 매화꽃 속에
삶의 움츠린 고난을 안아주는 파란 하늘과 희망의 구름이 떠오르고
봄은
꽁꽁 얼어붙은 땅에 귀대고 듣지 않아도
발가벗은 겨울나무 가지와 양지 언덕 아래 텃밭에서부터
연두 붉은 상큼한 향기로 온다
♧ 오솔길 – 채들
안개 한필 끊어다
장삼 지어 입고
산으로 가는 오솔길로
걸어가는 노승
이쪽으로 가나,
저쪽으로 가나,
세상사 안개 속이라고
더듬더듬 휘저으며
눈 감은 지팡이 따라가네
♧ 풀벌레가 잠자는 고독을 깨웠다 - 조성례
재채기를 하던 중 막혀버린 귓구멍
콧속이 자글자글 끓더니
갑자기 모든 소리들이 사라진다 오로지
언제부턴가 살고 있었는지 모르는 풀벌레만
귀와 머릿속을 저벅저벅 걸어 다니며 울고 있다
방안이 휑뎅그렁한 어둠속으로 갈아 앉는다
허공에 대고 손을 저어보나
내 존재조차도 사라지고 없다
속없는 풀벌레만
바람기 없는 귓속을 차지하고
엄마를 찾듯 징징대며 울어댄다
코를 통해서 머릿속으로 들어간 그의 무게만큼
이상한 공간에 갇혀버렸다
등 뒤에서
그림자가 밖을 향해 읍소하나
나의 울음소리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는다
좀체 물러설 기미가 없는 풀벌레를 쫒으려고
두 귀를 붙들고 목구멍에 힘을 주어보지만
여전히 저 혼자 살아서
귓속을 걸어 다니는 풀벌레
사방은 여전히 어둡다
♧ 너덜겅* 편지 1
물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청량한
겨울 너덜겅에서 편지를 쓴다
일만 마리의 물고기가 돌로 변했다는
크고 작은 돌무더기 위에 하얀 눈 쌓여 있다
새들이 눈 위에 새긴 경전들
섣달 된바람은 알고 있을까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문자들
드넓은 돌 바다를 바라보며
멀리 떠난 그대의 안부를 묻는다
몸 성히 잘 있는지 꿈은 상하지 않았는지
바위에 내린 이슬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너덜겅 근처 규봉암의 감로수
그대와 더불어 마실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날마다 출렁이는 생의 바다
그 파도 속에 우주의 이치 담겨 있다
너덜겅 군데군데 숨어 있는 풍혈대처럼
알 수 없는 생각의 깊이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울렁임이 있다
바람 불고 눈 내리는 한 겨울의 오후
그대에게 가는 길 아득한데
수천만 년 단단한 그리움이 흩어져
크고 작은 돌들로 흘러내리는 곳에서
돌과 나의 울음소리 전한다
---
* 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
♧ 고향 – 정봉기
마음의 뼈로
바로 서게 하는 중심에
아이의 강이 있다.
모래와 자갈이 고운
샛강의 기슭에서
아이는 자맥질로 컸다.
어른으로 자라
늙어진 지금에도
중심에는 항상 강이 흐르고 있다.
♧ 국수 먹기 좋은 날 - 박성일
‘우리 어제 국수 해 먹었어요’
멀리 사는 손자 녀석이 전화로 자랑을 한다
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분위가 언짢은 날이면
어머니가 예뻐하시는 어린 아들에게 부탁했었지
‘할머니! 칼국수 먹고 싶어요’
손자 말 한마디에 금방 함박웃음 가득 해지며
콩가루 어디 있느냐, 홍두깨 내 오너라
밀가루 반죽에 계란도 깨어 넣고
옛 솜씨대로 넓게 밀어 칼국수를 만드셨지
‘말만 하면 언제든지 할머니가 해 줄게’
손자를 보는 얼굴에 돌아온 발그레한 웃음
그렇게 조심스럽게 지낸 세월이었어
‘여보, 점심에 손칼국수나 먹으러 나갈까?’
빤히 나를 쳐다보더니 빙긋이 웃는다
‘국수 먹기 좋은 날이네요’
손자 전화에 지난 일들이 생각난 걸까?
창 너머 보이는 하늘이 참 푸르디푸르다
*시 : 월간 『우리詩』2021년 여름호(통권 396호)에서
*사진 : 민백미꽃(2010. 6. 22. 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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