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사의 단풍 – 강상돈
만행萬行을 떠났던 산사의 나뭇잎도
제 몸 가누지 못해 불 밝혀 떨어지고
가을 산 연등 행렬이 꽃 물들여 가고 있다
♧ 여백餘白 - 강태훈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마음의 여유와
배려의 상징이다
나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거늘
단아한 마음속에
착한 소명이 담겼다
♧ 알 수 없는 길 – 곽경립
가는 길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길을
얼마나 헤매며 걸어왔던가,
날은 저물고 바람 차가운데
세상번뇌 어디다 버려야 할지
부질없이 달빛만 이슬에 젖네.
♧ 풍경 – 곽은진
새벽바람 차가운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누구를 그리 부르더냐
댕그렁 댕그렁
정성 일념
댕그렁 염불 소리에
물고기 몸 벗어나
해탈 열반 이루리
♧ 섬 무덤 – 김대규
싱싱한 물고기로 퍼덕이던
또 하루가 어느새 사라지고
약속도 없이 내일이 되어버리고
놓쳐버린 인연들이 새들의 울음으로
끼룩 끼룩 끼르륵 끼르륵
섬에 드러누워 잠이 들면
섬 무덤이 된다.
이 세상에 없는 별들의 언어로 묘비명을 만들고
저 세상에 없는 풀과 꽃들이 몸을 감싸 안으면
나는 낮이고 밤이고
해와 달을 길어 올리겠지
섬에 품기어서 잠이 들면
섬 무덤이 된다.
유적처럼 흩어진 새들의 분비물들이 바위를 비집고
다시 환생할 것 같은 잠속에서
손에 닿을 듯 만져질 것만 같은 노래가
붉은동백으로 날선 혓바닥에 피어나다
하을로 달아나 희미한 낮달이 될까
섬에 안기어서 잠이 들면
섬 무덤이 된다.
♧ 꽃 – 김대봉
피었다 지는 거야
밤낮 따로 없겠지만
어둠이 이슥해야
꽃망울 터지는 길
밤하늘
별들만 안다
남몰래
벙그는 길
♧ 풍경 – 김성주
섣달그믐
저녁 종소리 울타리 너머 마을로 간다
가서, 능청스레 둥근 밥상에 둘러앉겠지
절 마당에 들어선 눈발
말라버린 것들이 남긴 기록들 위로
한 손 한 눈 얹으며
목련으로 간다
바람이 몸부림치고 간 자리
등걸에 달라붙은 매미의 허물
깃털 두엇 남은 직박구리네 빈집
어디에도
찬란했던 목련의 계절은 없다
낯선 기록 앞에서
파르르 떠는 눈발
푹푹 눈이 내린다
대웅전 새 나온 불빛
설雪 목련 위에 번진다
♧ 유효한 사랑 – 김승범
거짓말 같은 일이
거짓말처럼 일어났으면
앞발을 저어하며 걷는
물새 한 마리
어디로 가는 걸까
가슴을 찔러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아
온 몸을 던지니
뭇 시선이 뜨겁다
동아줄로 꽁꽁 묶었는데
벗어나려는 당신 몸부림에
가슴 한켠 싸한 바람이 인다
유효한 사랑이란
소유하고픈 내 욕망
발아 준비를 마친 씨앗
겨울산은 꿈틀댄다
* 『혜향문학』 2021년 상반기 제16호에서
* 사진 : 단풍나무 시과(翅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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