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혜향문학' 2021년 상반기 제16호의 시

김창집 2021. 6. 30. 13:19

산사의 단풍 강상돈

 

만행萬行을 떠났던 산사의 나뭇잎도

 

제 몸 가누지 못해 불 밝혀 떨어지고

 

가을 산 연등 행렬이 꽃 물들여 가고 있다

 

여백餘白 - 강태훈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마음의 여유와

배려의 상징이다

 

나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거늘

 

단아한 마음속에

착한 소명이 담겼다

 

알 수 없는 길 곽경립

 

가는 길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길을

 

얼마나 헤매며 걸어왔던가,

 

날은 저물고 바람 차가운데

 

세상번뇌 어디다 버려야 할지

 

부질없이 달빛만 이슬에 젖네.

 

풍경 곽은진

 

새벽바람 차가운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누구를 그리 부르더냐

댕그렁 댕그렁

정성 일념

댕그렁 염불 소리에

물고기 몸 벗어나

해탈 열반 이루리

 

섬 무덤 김대규

 

싱싱한 물고기로 퍼덕이던

또 하루가 어느새 사라지고

약속도 없이 내일이 되어버리고

놓쳐버린 인연들이 새들의 울음으로

끼룩 끼룩 끼르륵 끼르륵

 

섬에 드러누워 잠이 들면

섬 무덤이 된다.

 

이 세상에 없는 별들의 언어로 묘비명을 만들고

저 세상에 없는 풀과 꽃들이 몸을 감싸 안으면

나는 낮이고 밤이고

해와 달을 길어 올리겠지

섬에 품기어서 잠이 들면

섬 무덤이 된다.

 

유적처럼 흩어진 새들의 분비물들이 바위를 비집고

다시 환생할 것 같은 잠속에서

손에 닿을 듯 만져질 것만 같은 노래가

붉은동백으로 날선 혓바닥에 피어나다

하을로 달아나 희미한 낮달이 될까

 

섬에 안기어서 잠이 들면

섬 무덤이 된다.

 

김대봉

 

피었다 지는 거야

 

밤낮 따로 없겠지만

 

어둠이 이슥해야

 

꽃망울 터지는 길

 

밤하늘

 

별들만 안다

 

남몰래

 

벙그는 길

 

풍경 김성주

 

섣달그믐

저녁 종소리 울타리 너머 마을로 간다

가서, 능청스레 둥근 밥상에 둘러앉겠지

절 마당에 들어선 눈발

말라버린 것들이 남긴 기록들 위로

한 손 한 눈 얹으며

목련으로 간다

 

바람이 몸부림치고 간 자리

등걸에 달라붙은 매미의 허물

깃털 두엇 남은 직박구리네 빈집

어디에도

찬란했던 목련의 계절은 없다

낯선 기록 앞에서

파르르 떠는 눈발

 

푹푹 눈이 내린다

 

대웅전 새 나온 불빛

목련 위에 번진다

 

유효한 사랑 김승범

 

거짓말 같은 일이

거짓말처럼 일어났으면

앞발을 저어하며 걷는

물새 한 마리

어디로 가는 걸까

가슴을 찔러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아

온 몸을 던지니

뭇 시선이 뜨겁다

동아줄로 꽁꽁 묶었는데

벗어나려는 당신 몸부림에

가슴 한켠 싸한 바람이 인다

유효한 사랑이란

소유하고픈 내 욕망

발아 준비를 마친 씨앗

겨울산은 꿈틀댄다

 

 

                                         * 혜향문학2021년 상반기 제16호에서

                                                 * 사진 : 단풍나무 시과(翅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