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마의 꿈 – 洪海里
꼭두식전 잠 깨어
창밖을 보니
속눈썹 깊은 어둠
샐 날이 없어
취한 달 징검징검
건너가는 봄
가는 길 주막집의
꽃소주 한 잔.
♧ 산눈시山眼詩․7 - 김영호
높은 산 정상을 향하여
땀 흘려 올랐네.
속정을 모두 비우고
산 중부 능선에 오르니
산정山頂의 나무가 스스로 내려와
나를 업어주었네.
나무에 업히니
하늘이 포옹을 해주었네.
속망을 다 비우면
산 중턱에서 산정에 오르는 것이네.
속사 다 버리면
집에서도 산정을 오를 수 있고
방안에서도 하늘을 오르네.
방안에서도 신을 만날 수 있네.
♧ 존재감 실종 – 박원혜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려 한다
그것으로 존재감을 느끼려 한다
어느 날 문득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내면의 괴이한 상태가 발생하면
먹먹해지는 사고가 또한 발생된다
밤엔 막막해지고
낮엔 먹먹해진다
나는 오늘도 이런 상태다 자폐도 아니고
우울증도 아니라는데 무엇이 나를
이 지경으로 끌고 가는가
♧ 이방인 시편 - 장성호
-I've been loving you too long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길모퉁이에 분홍빛 얼굴의 한 여인이 비에 젖는다
그날도 어김없이 추레한 한 이방인이 그녀 곁에 다가간다
그녀는 그를 외면하며 말한다
나는 이젠 지쳤고 자유롭게 빗물에 흠뻑 젖고 싶어요
그는 오열하며 말한다
그대여 나는 그대를 너무 오랫동안 사랑해왔어요 이젠 멈추고 싶지 않아요
그는 무릎을 꿇으며 말을 잇는다
지난날 우리의 오랜 만남으로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어요
그대를 너무나 사랑했나 봐요
제발 나를 멈추게 하지 말아요
그녀는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빗물에 온몸을 맡긴다
저기 한 이방인이 소울 가수 오티스 레딩의 노래 “I've been loving you too long”를 읊조리며 흠뻑 젖은 라일락꽃 앞에서 비통한 슬픔에 잠긴다
♧ 도토리거위벌레 - 김완
새인봉 거쳐 동적골로 내려오는 하산 길이다
가파른 내리막 산길, 도토리 하나씩 매달린 채
참나무 잎가지가 발에 밟힐 정도로 즐비하다
허리 굽혀 주워보니 도토리를 매단 어린 줄기
끝자락이 가위나 칼로 자른 듯 끊어져있다
이는 거센 비바람 때문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도토리를 축내는 도토리거위벌레의 짓이다
도토리거위벌레 성충이 깍정이와 도토리에
예리한 긴 주둥이를 꽂아 구멍을 내고
거기에 산란관을 꽂아 수정란을 산란한다
그런 다음 가지 끝자리를 날카로운 주둥이로
무쩍무쩍 잘라 얼른 땅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도토리거위벌레 알이 도토리를 자양분 삼아
애벌레가 되어 나온 후 흙을 파고 들어가 산다
알에서 애벌레로, 번데기에서 어른벌레 순으로
교육받지 않아도 저절로 이어온 체화된 한살이
교육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인간과
너무나 대조되는 벌레의 삶에서 문득 허망하다
내력도 모르는 사람들은 도토리묵 해 먹겠다고
하나같이 아직 여리고 새파랗고 반드르르한
흐드러지게 떨어진 풋도토리 싹싹 쓸어 담는다
♧ 초록으로 - 성숙옥
산길에 올라서니
새소리가 물방울처럼 떨어진다
푸른빛들이
머릿속 생각들을 순간 비워낸다
나무의 물관이 켜는 저 빛
내가 놓친 색깔이구나
낯선 색이 내게 올 때가 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한 방향의 생각을 품어야 하는데
오른편인지 왼편인지 움켜쥐다
연두와 분홍도
암청색으로 기울어지고 마는 내 사랑의 습관 있다
피는 기쁨보다 지는
슬픔이 어둠을 키운 까닭이다
걸어가는 동안 길을 푸드덕거리는
초록 깃털들,
붉은 꽃잎 지친 내 가슴 기슭으로 날아온다
♧ 석양夕陽을 바라보며 – 이제우
해가 긴가 하여
어슬렁거리다가
해 짧은 걸
늦게야 알고
천방지축
날뛰다가
백발이 되어
하늘을 바라보니
아, 설워라
섣달그믐
해가 서산에 걸렸네
* 월간 『우리詩』2021년 7월 397호에서
* 사진 :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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