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
쓸쓸한 허공
나지막이 비상하던
날개 여린 새 한 마리
다 늦은 가을 저녁 어스름
내 가슴에 와 깃을 치고 있느니
젖은 자리 또 적시며 울고 있느니.
♧ 입춘 추위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어디 가고 싶냐 물어도
묵묵부답
조금 있다 또 문을 엽니다
밖에 나가고 싶냐 물어도
그냥 웃습니다
또 문을 열고 치어다봅니다
누굴 기다리느냐 물어 봐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또 다시 문을 열고 쳐다봅니다
속이 답답하냐 물어도
하늘만 바라보다 문을 닫습니다
입춘날 날씨 매섭게 찬데
어찌 봄이 오겠습니까?
문을 열면 칼바람만
제 세상인 듯 쩡쩡하니 밀려듭니다.
♧ 다저녁때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 어린아이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 어느 날 문뜩
아내 얼굴을 보지 않고
한평생 살았습니다
늘 아늠 곱고 젊을 줄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문뜩 마주친 아내
주름지고 핏기 가신 창백한 모습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아늘아늘하던 아내는 어디 가고
낯선 사람 하나 내 앞에 서 있습니다.
♧ 낯선 길 위에서
온몸이 멍멍해집니다
온종일 막연한 불안감에 마음이 먹먹합니다
낯선 거리에 서 있는 한 사내
어디로 갈지 몰라, 홀로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취된 듯, 아니
만취한 듯 허둥대고 있습니다
폐금廢金도 금이라서 반짝이는데
나이 들어 병이 나면
왜 사람은 빛이 나지 않는 걸까요
단물난 단벌의 허아비 하나
길 위에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 안개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안 보이니 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내가 없고
내게 네가 없습니다
한평생 누구에게나 가지 못한 길이 있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할 길이 있습니다
쉬운 길도 편한 길도 있었지만
먼 길을 돌아, 이제
자갈길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생각해도
짙은 안개에 갇혀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듯
안개가 짙으면 길이 보이지 않아
청맹과니 하나 칠흑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놀북,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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