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에 대한 향기 - 서정원
거짓말에도 향기가 날까
소리 큰 방귀는 냄새가 나지 않듯
무향일까
봄날 꽃이 핀만큼 찐할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지나더라도
들통 날 것인데
나무는 가만히 있는데 바람이 문제이듯
시치미 뗀다고 소용없는 거
감춘다고 향기가 나지 않을까, 정말
♧ 해창막걸리 - 김민휴
그 옛날, 우리 아부지는 고천암 섬지마을에서 겨울이면 해우농사를 하셨는데요,
마을 앞 돛대배미 논에 벼가 무럭무럭 크는 더운 여름날,
멀리 담양 대밭까지 가서 사온 겉은 시퍼렇고 속은 하얀 대나무를 쩍쩍 갈라
새끼줄로 해우발을 엮었어요.
한참 발을 엮다가 조금 무렵엔 만호바다 상거리강 건너 해창 앞바다
갈대밭에 와서 조릿대 키만한 갈대를 베어 목선 가득 싣고 오셨는데요,
동구섬 갯바위에 배 대놓고 지게 바작에 푸른 갈대를 가득 담아 고개 넘어 우리
집까지 저 날렸는데요,
가쁜 숨과 함께 갈대를 마당에 부리고는 식구대로 나와 펴서 갈대를 말리게 했는데요,
갈대가 마르면 이파리를 따내고 가는 갈대 줄기로 해우장을 엮어 겨울철 해우농사를
준비하셨어요.
맨날맨날 만호바다 건너 마을에 가보고 싶던 열 살 남짓 나는, 어느 여름날 드뎌
아부지를 따라나섰는데요,
지국총 삐그덕 지국총 삐그덕 목선을 타고 갯강을 건너 해창 앞바다에 와 갈대를
베는 아부지를 신나게 도왔어요.
아부지도 땀 줄줄, 우리 집 막둥이인 나도 땀 줄줄, 아부지와 나는 목선에 푸른 갈대를
가득 실어놓고,
걸음 재촉해 뻘밭 밖 뭍으로 나가 술 익는 냄새 피어나는 해창막걸리 주조장에
올라갔는데요,
내 입 안에서는 벌써 주조장 앞 점방에서 아부지가 사주신 아메사탕이 이쪽저쪽
볼따구니로 굴러다니고 있었죠.
아부지는 하얀 툭사발에 하얗고 누런 막걸리를 쿨렁쿨렁 부어 꿀꺽꿀꺽 들이키
셨는데요,
아따, 만나다, 어 허잇! 거푸 서너 잔을 따라 들이키며 짧은 소리 토막을 하셨고,
나는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킴시로 저 뜰뜰한 물이 진짜로 아메사탕 보다 맛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내 호랑에는 아메사탕, 눈깔사탕 쬐끔, 아부지는 해창막걸리 대성 한 되,
지국총 삐그덕 지국총 삐그덕 노를 저어 도로 섬지마을로 돌아오는데요,
만호바다를 내리쬐던 높은 해는 울돌목 너머 진도 세방 쪽으로 기울고 뱃전에
찰랑거리는 물결은 평화로웠어요.
평화를 축하하는 듯 산비둘기들이 배 위를 지나 서쪽 새굴바우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이제 그 옛날 갯강이 고천암호가 되고 해마다 갯것 풍년이던 만호바다는 넓은
간척지가 되었는데요,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
구식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지금 고향땅을 추억여행하고 있는데요,
노곤한 몸 꼬드기어 해창막걸리 주조장에 들러, 엄마 젖 같은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는데요,
그 옛날 아부지 목소리가 귓가에 철렁여요, 아따, 만나다, 어 허잇!
♧ 비 멀미 – 옥효정
무소식은 희소식에 거의 가까웠다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았으나
기다리지 않는 소식 또한 오지 않았으므로
오열하는 빗줄기 속에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길을 잃었다
손길 닿은 적 없는 천장에 검푸른 꽃이 피고
낮달 닮은 얼굴 하나가 섬처럼 떠올랐다
사람들은 완성한 문장을 입안에 넣은 채
억지로 묵언 중이다
비는 내일도 내릴 것이므로
우리는 바이킹을 즐길 것이다
산은 무너지고 강은 넘쳐
밀봉된 부재는 곧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경전은 다시 뜨거워질 것이다
무소식은 희소식에 거의 가까웠으므로
♧ 흘러 다니는 섬 - 조정인
그는 모든 입구에서 차단되었다. 역병을 옮기는 자가 아닌
일개 시인일 뿐인 그는
그 홀로 일어난 새벽, 검은 종이에 검은 글씨로 써 보던
문, 내일, 희망, 사랑 같은 글씨는 깨끗이 태워
음복한 후 입안을 헹궜다.
그리고 암전.
유일한 피붙이인 죽음만이 그의 곁에 남아 이마를 짚어주었고
이불깃을 여며주었고 몇 날, 남은 숨을 세고 있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빗방울 같던 마지막 숨을
손바닥에 받고 있었다.
그는 냉장고 앞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사라진 그를 커튼으로 가려두고 산 자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섞었다 말들의 혼음이 몇 순배 돌았다.
사람들 사이,
망자는 흘러다녔고 침묵했고 어떤 대목에선 끅끅 웃었다.
어떤 웃음은 소리 죽인 울음보다 먹먹하다. 먹먹하다는 건
비닐물주머니 같은 것, 이목구비가 없다.
냉장고 문을 열다가 불현듯 모든 게 단순해졌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는 의혹덩어리들이 실은
먹고 마시는 일에 연루돼 있다.
그가 누구라도 질질 물을 흘리는, 텅 빈 냉장고 앞에
쓰러져 죽을 수 있다.
* 내일을 여는《작가》 2021년 상반기(7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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