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사진첩
산정의 수직벽 놔두고
세월은 하산길 따라 흘렀습니다
모롱이마다 박아놓았던 기억들
누렇게 타들어가는
흑백산이 되어 솟고
나는 그 산자락 끝에서
먼 기억을 더듬어 오르는
갓 스물의 산꾼
쌍계봉 무명암 부채바위
인수 선인 숨은벽을 돌아
천화대 범봉끝 토왕성을 오르다
어느 해 겨울
로프보다 질긴 제 명줄 사려서 지고
하얀 북벽너머로 훌훌 가버린
악우*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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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종순과 김원겸은 86년 겨울 알프스의 아이거북벽 완등후 조난사했다. 그 뒤 체육훈장 기린장이 추서되었다.
♧ 세월 저편 두고 온 이별 - 권경업
알게 모르게 조개골 조금씩 푸르르고
물소리 한층 목청을 돋우었다
상수리 숲 땅거미 종종대며 내려간 뒤
문득, 소소리 바람에 실려오는
세월 저편 두고 온 이별 하나
혼자 마신 몇 잔의 소주 목에 걸리누나
칠(七)형제 침봉(針峰) 고스란히 남겨 둔
아직 한창일 사람아
숨죽여 찾아 간 그곳
오를 산이 없다면 다시 돌아오라
골 깊은 장당골 동고비도
돌아와 둥지를 틀었다
동강 난 이 땅의 산행이지만
나와 그대의 해 질 무렵은
온 산 불 지르는 단풍이려니
가슴 들끓이던 어린 날
늘상 어깨동무로 오르던 신밭꼴
지금 몽실몽실 달 뜨고
탱자 울 안 능금꽃은 부풀어 부풀어
♧ 피가 푸른 사람들
꿈을 꾸어도 늘 천상(天上)의 꿈만 꾸는,
품어도, 늘 제 오르는 산보다 더 높은 것을 품은
피가 푸른 사람들
산정(山頂)으로 돌아가는 옆길을 두고
벽(壁)으로 벽으로만 오르는 고행(苦行)의 길(道)
천화대 범봉 끝, 알프스 마(魔)의 벽
히말라야 설산(雪山) 마루
너희 영혼의 짙푸른 하늘
그 무한 무소유의 자유가
오름의 절대 이유인
그대들은 구도승(求道僧)
♧ 황병산
지난 밤 잠못든 것은
텐트 아래 무너진
보라빛 용담꽃의 아픔이었고
동살이 비치는
황병산 오솔길에
무릎 위로 얼롱지는 이슬은
하얀거미 아이거*
애절한 산벗의 눈물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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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 스위스 베르네오블랜드 지방에 있는 알프스 삼대 북벽중의 하나.
♧ 잎 지는 날은
중봉 오름길 가로막던 주목과
피어오르지 않는 신밭골 밥 짓는 연기와
대원사 본존불 미소를 머금은 토박이들과
유평리 주막집 늙수그레한 주인 내외의
막걸리같이 구수한 인정과
가랑잎 분교 멎어 버린 풍금소리와
보릿가을 끝난 들녘 이삭 줍던 유년과
세월의 강 되어 간
평촌리 정거장 가겟집 처자 아이와
첫 동정을 받아 간
원지 삼거리 니나노집 늙은 작부와
오래 전, 알프스를 넘어 하얀 산이 된 산벗
떠나가 멀어진 것 다 그립다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熱目魚)였나 보다
어찌, 제 속내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난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도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서러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生明紬)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난다
아!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도서출판 전망, 2004) 등에서
* 사진 : 설악산(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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