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권경업 '낡은 사진첩' 외 5편

김창집 2021. 7. 15. 18:47

낡은 사진첩

 

산정의 수직벽 놔두고

세월은 하산길 따라 흘렀습니다

모롱이마다 박아놓았던 기억들

누렇게 타들어가는

흑백산이 되어 솟고

나는 그 산자락 끝에서

먼 기억을 더듬어 오르는

갓 스물의 산꾼

쌍계봉 무명암 부채바위

인수 선인 숨은벽을 돌아

천화대 범봉끝 토왕성을 오르다

어느 해 겨울

로프보다 질긴 제 명줄 사려서 지고

하얀 북벽너머로 훌훌 가버린

악우*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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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종순과 김원겸은 86년 겨울 알프스의 아이거북벽 완등후 조난사했다. 그 뒤 체육훈장 기린장이 추서되었다.

 

세월 저편 두고 온 이별 - 권경업

 

알게 모르게 조개골 조금씩 푸르르고

물소리 한층 목청을 돋우었다

상수리 숲 땅거미 종종대며 내려간 뒤

문득, 소소리 바람에 실려오는

세월 저편 두고 온 이별 하나

혼자 마신 몇 잔의 소주 목에 걸리누나

 

()형제 침봉(針峰) 고스란히 남겨 둔

아직 한창일 사람아

숨죽여 찾아 간 그곳

오를 산이 없다면 다시 돌아오라

골 깊은 장당골 동고비도

돌아와 둥지를 틀었다

 

동강 난 이 땅의 산행이지만

나와 그대의 해 질 무렵은

온 산 불 지르는 단풍이려니

 

가슴 들끓이던 어린 날

늘상 어깨동무로 오르던 신밭꼴

지금 몽실몽실 달 뜨고

탱자 울 안 능금꽃은 부풀어 부풀어

 

피가 푸른 사람들

 

꿈을 꾸어도 늘 천상(天上)의 꿈만 꾸는,

품어도, 늘 제 오르는 산보다 더 높은 것을 품은

피가 푸른 사람들

 

산정(山頂)으로 돌아가는 옆길을 두고

()으로 벽으로만 오르는 고행(苦行)의 길()

 

천화대 범봉 끝, 알프스 마()의 벽

히말라야 설산(雪山) 마루

너희 영혼의 짙푸른 하늘

그 무한 무소유의 자유가

오름의 절대 이유인

그대들은 구도승(求道僧)

 

황병산

 

지난 밤 잠못든 것은

텐트 아래 무너진

보라빛 용담꽃의 아픔이었고

동살이 비치는

황병산 오솔길에

무릎 위로 얼롱지는 이슬은

하얀거미 아이거*

애절한 산벗의 눈물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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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 스위스 베르네오블랜드 지방에 있는 알프스 삼대 북벽중의 하나.

 

잎 지는 날은

 

중봉 오름길 가로막던 주목과

피어오르지 않는 신밭골 밥 짓는 연기와

대원사 본존불 미소를 머금은 토박이들과

유평리 주막집 늙수그레한 주인 내외의

막걸리같이 구수한 인정과

가랑잎 분교 멎어 버린 풍금소리와

보릿가을 끝난 들녘 이삭 줍던 유년과

세월의 강 되어 간

평촌리 정거장 가겟집 처자 아이와

첫 동정을 받아 간

원지 삼거리 니나노집 늙은 작부와

오래 전, 알프스를 넘어 하얀 산이 된 산벗

 

떠나가 멀어진 것 다 그립다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熱目魚)였나 보다

 

어찌, 제 속내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난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도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서러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生明紬)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난다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도서출판 전망, 2004) 등에서

                                             * 사진 : 설악산(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