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 발간

김창집 2021. 7. 19. 16:34

아내

 

쓸쓸한 허공

나지막이 비상하던

날개 여린 새 한 마리

다 늦은 가을 저녁 어스름

내 가슴에 와 깃을 치고 있느니

젖은 자리 또 적시며 울고 있느니.

 

입춘 추위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어디 가고 싶냐 물어도

묵묵부답

조금 있다 또 문을 엽니다

밖에 나가고 싶냐 물어도

그냥 웃습니다

또 문을 열고 치어다봅니다

누굴 기다리느냐 물어 봐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또 다시 문을 열고 쳐다봅니다

속이 답답하냐 물어도

하늘만 바라보다 문을 닫습니다

입춘날 날씨 매섭게 찬데

어찌 봄이 오겠습니까?

문을 열면 칼바람만

제 세상인 듯 쩡쩡하니 밀려듭니다.

 

다저녁때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어린아이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어느 날 문뜩

 

아내 얼굴을 보지 않고

 

한평생 살았습니다

 

늘 아늠 곱고 젊을 줄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문뜩 마주친 아내

 

주름지고 핏기 가신 창백한 모습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아늘아늘하던 아내는 어디 가고

 

낯선 사람 하나 내 앞에 서 있습니다.

 

낯선 길 위에서

 

온몸이 멍멍해집니다

온종일 막연한 불안감에 마음이 먹먹합니다

낯선 거리에 서 있는 한 사내

어디로 갈지 몰라, 홀로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취된 듯, 아니

만취한 듯 허둥대고 있습니다

폐금廢金도 금이라서 반짝이는데

나이 들어 병이 나면

왜 사람은 빛이 나지 않는 걸까요

단물난 단벌의 허아비 하나

길 위에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안개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안 보이니 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내가 없고

내게 네가 없습니다

한평생 누구에게나 가지 못한 길이 있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할 길이 있습니다

쉬운 길도 편한 길도 있었지만

먼 길을 돌아, 이제

자갈길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생각해도

짙은 안개에 갇혀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듯

안개가 짙으면 길이 보이지 않아

청맹과니 하나 칠흑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놀북,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