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어느 날
숲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가고 싶어
혼자
헤매다
길은 보이지 않고
돌아와 보니
아, 칠순이어라
그래도
엉성한 발자국
한 줄기 위로의 바람 되길
소망해 본다
♧ 벽화를 그리는 사람
막다른 골목 동굴 속
콘크리트 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모자 눌러 쓰고
삼각 천으로 얼굴 가린 채
묵언수행 중
붓이 춤춘다
신들린 사람처럼
집 떠난 아이들 부르고 있다
제지차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하던
아이들
하나
둘
돌아오고
피리소리 같은 붓놀림에
울타리마다
접시꽃 동백꽃 개나리꽃이 피어나고
유채꽃이 만발하다
잠자던 동굴 같던 골목이
왁자지껄
향기 뿜어내고 있다
♧ 어승생악에서
새해 첫날
산으로 올라온 물고기들
어승생악에 걸렸다
떼 지어 고향 떠나온 이유
증명이라도 하듯
피라미 같은 작은 몸에 가시가
투명하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더니
나무들이 실성을 했나
산으로 올라온 물고기
돌아가는 걸 잊어버렸다
퇴화하여
헤엄칠 줄 모른다
나도 여기 매달려
빙어처럼
투명하게
가벼워지고 싶다
♧ 증거인멸
옛날,
세 들어 하숙 치던 3층 건물이 철거되고 있었다
벽돌이 무너지고
실핏줄 같은 철근이 잘리고
구부러지며
나의 과거가 해체되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막내리막
수없이 많은 도시락을 쌌던 곳
기억 속으로 수몰되는 순간이다
영원히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저 먼 곳을 향해
추억열차가 떠나가고 있다
푸른 날 흔적이 얼룩져 있던
발자국 무게가 낙관처럼
찍혀 있던
세월의 문신들이
조각조각 흩어지고 있다
일출 같은 내일을 향해
쉬지 않고 오르던
계단
♧ 하멜 상선 전시관에서
나는 지금 표류 중
흔들리는 마음 따라
망망대해를 떠돈다
나침판 없는 파도 위에서
갈매기 울음 벗 삼아
흘러가는 구름처럼 조류에 밀려간다
예기치 않은 풍랑으로 곤두박질치고
모래밭에 떠밀려온 선인장 같이
풍랑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며
표류해 보지 않은 마음 어디 있을까
모래 위에 뿌리내리는 선인장 같이
실같이 가는 손 내밀며 살자
♧ 따뜻한 국물이 그리운 날
간밤에 내린 비로
언제 건천이었느냐
배고픈 다리 밑으로 흙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바람도 덩달아
이어달리기 하듯
흔들다리 위에서
두 팔 벌려 달려오는 파도를
으스러지게 껴안는다
회색빛 흐린 하늘 사이로
제주 해녀 국수집 간판이
따뜻하게 고개 내밀어
쓸쓸한 마음을 녹일 듯
거센 바람을 잠재울 듯
*시 : 김순선 시집 『따뜻한 국물이 그리운 날』 (열림문화, 2021)에서
*사진 : 더덕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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