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척추관협착증 - 장문석
새삼 직립과 중력의 관계를 생각한다
한번 좁아진 길은 다시는 넓어지지 않는다
운행기록을 뒤적이려다 그만 둔다
종착역 가까운 어디쯤부터였을 것이다
조개탄 개수를 굳이 셀 필요는 없겠다
쳐다보는 하늘보다 굽어보는 땅이 편하다
♧ 센서등 - 심우기
그 여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어둠에 속한 그녀를 구해주는 것은 늘 그지만
이것은 혼자만의 외사랑
비가 오나 날이 춥나 그녀만 보면
순정한 반려동물의 팔딱거림처럼
반짝이며 눈에 불을 켠다
등만 보이고 뒤돌아서 걷는 그녀를 보며
혼자 외롭게 매일 식어가는 그
긴 외로움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바다의 등대와 사람 없는 거리의 가로등과 같은 병을 앓고 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이 아파도 호소하지 못하는 병을 앓는다
어두운 복도 끝 멀리서 누군가 걸어온다
그는 어둠 속에서 혼자 두근거리고 있다
♧ 우렁이 껍질 - 성숙옥
강아지가 무릎 위로 올라온다
작은 강아지를 보며 요양원의 치매 엄마를 생각한다
전화기를 놓쳐 대답 없는 엄마
들리지 않는 소리의 여운은 헛헛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엔 푸른 시절만 앙상한 뼈에 붙어 있다
닳은 몸에 빌린 나의 기억을 갚고 싶지만, 마음뿐
기억이 기억에게 말을 건네며
그 뿌리에 달린 구근들은 뼈마디 휘던 날로 데려간다
유년시절 폐렴이 피운 열꽃에 시달릴 때
엄마는 무릎으로 나를 안고 장사 나갈 떡을 만들었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그 무릎의 심연은
힘이 파일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데
기억 한 점씩 가물거리다가 햇살에 부딪히면
그 빛의 파장으로 멀쩡해지기도 하는 엄마
깜박거리는 치매의 시린 외등을 따라가는
나는 손을 잃은 장갑처럼 서럽다
자신의 살을 파서 새끼를 기르고
껍질만 남아 둥둥 떠다닌다는 우렁이,
오늘은 샛별아파트를 지나온 복수초요양원이
그 껍질 되어 바닥 모르는 내 슬픔 위로 부유한다
♧ 따끈한 첫 시집 - 김명옥
손바닥만 한 시의 텃밭 묵힐 수 없어
첫 시집 세상에 내놓고
산후 우울증인가
봄비는 오는데
우두커니 앉아 멍 때리다가
포트에 물을 끓여
유기농 보리차 티백을 넣고
옛날식 엽차 잔에 보리차 따르고
두 손으로 감싼다
왜 찻잔은 두 손으로 감싸게 될까
너의 두 볼
너의 따뜻한 손처럼
따뜻한 것은 두 손으로 감싸야하는 걸까
따끈한 내 시집도
누군가가 두 손으로 감싸 쥐면
참 행복하겠다
♧ 함께 – 김혜천
‘함께’라는 말의 지평은 넓다
둥근 달 아래 맞잡은 손 한 마당
옥매산 의병술擬兵術엔 오던 적도 물러섰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 대해로 흘러가듯
에이던 지난 기억 다 흘려 보내고
너와 나의 어깨로 산맥 이루자
닿을수록 뻗어가는 뿌리줄기
기상과 가상을 합해 우리 영토 넓히자
지금껏 꺼내지 못한 감정들을 꺼내 놓고
울부짖는 길 위에 어머니의 손길처럼
따뜻한 손 함께 잡고 강강술래
♧ 하지 무렵 – 강우현
바람의 귓속말에
산 중턱 키 큰 밤나무
꽃을 흔들고
잎은 잎대로 움찔
초록 뒤에 교미를 숨기느라
녹음은 한 뼘 더 우거진다
애써 중심 잡으며
푸르디푸른 수화를 읽느라
흠뻑 젖는 산허리
오래전 광교산 하산길에
그 남자 그 여자 손에서 피던 꽃처럼
신록의 언어 눈부시다
♧ 연밥 - 신휘
밥심으로 산다고 했다
밥숟갈 들 힘만 있어도
아니 죽는다고 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 있다고 했다
볕들 날 온다고도 했다
오호라! 내 어머니
미추美醜는 늘 한 끗 차였으니
그리하여
한평생 녹슨 솥 하나 허공에 걸어둔 채
저리도 환한 밤
궁기처럼,
참 오래도 지어내셨던 거로구나
* 시 : 월간 『우리詩』 2021년 08월 398호에서
* 사진 : 새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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