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순선 시집 '따뜻한 국물이 그리운 날' 발간

김창집 2021. 8. 10. 00:11

시인의 말

 

어느 날

숲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가고 싶어

혼자

헤매다

길은 보이지 않고

돌아와 보니

 

, 칠순이어라

 

그래도

엉성한 발자국

한 줄기 위로의 바람 되길

소망해 본다

 

벽화를 그리는 사람

 

막다른 골목 동굴 속

콘크리트 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모자 눌러 쓰고

삼각 천으로 얼굴 가린 채

묵언수행 중

 

붓이 춤춘다

신들린 사람처럼

집 떠난 아이들 부르고 있다

 

제지차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하던

아이들

하나

돌아오고

 

피리소리 같은 붓놀림에

울타리마다

접시꽃 동백꽃 개나리꽃이 피어나고

유채꽃이 만발하다

 

잠자던 동굴 같던 골목이

왁자지껄

향기 뿜어내고 있다

 

어승생악에서

 

새해 첫날

산으로 올라온 물고기들

어승생악에 걸렸다

 

떼 지어 고향 떠나온 이유

증명이라도 하듯

피라미 같은 작은 몸에 가시가

투명하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더니

나무들이 실성을 했나

산으로 올라온 물고기

돌아가는 걸 잊어버렸다

 

퇴화하여

헤엄칠 줄 모른다

 

나도 여기 매달려

빙어처럼

투명하게

가벼워지고 싶다

 

증거인멸

 

옛날,

세 들어 하숙 치던 3층 건물이 철거되고 있었다

벽돌이 무너지고

실핏줄 같은 철근이 잘리고

구부러지며

나의 과거가 해체되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막내리막

수없이 많은 도시락을 쌌던 곳

기억 속으로 수몰되는 순간이다

영원히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저 먼 곳을 향해

추억열차가 떠나가고 있다

 

푸른 날 흔적이 얼룩져 있던

발자국 무게가 낙관처럼

찍혀 있던

세월의 문신들이

조각조각 흩어지고 있다

 

일출 같은 내일을 향해

쉬지 않고 오르던

계단

 

하멜 상선 전시관에서

 

나는 지금 표류 중

흔들리는 마음 따라

망망대해를 떠돈다

 

나침판 없는 파도 위에서

갈매기 울음 벗 삼아

흘러가는 구름처럼 조류에 밀려간다

 

예기치 않은 풍랑으로 곤두박질치고

모래밭에 떠밀려온 선인장 같이

 

풍랑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며

표류해 보지 않은 마음 어디 있을까

 

모래 위에 뿌리내리는 선인장 같이

실같이 가는 손 내밀며 살자

 

따뜻한 국물이 그리운 날

 

간밤에 내린 비로

언제 건천이었느냐

배고픈 다리 밑으로 흙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바람도 덩달아

이어달리기 하듯

흔들다리 위에서

두 팔 벌려 달려오는 파도를

으스러지게 껴안는다

 

회색빛 흐린 하늘 사이로

제주 해녀 국수집 간판이

따뜻하게 고개 내밀어

 

쓸쓸한 마음을 녹일 듯

거센 바람을 잠재울 듯

 

 

                             *: 김순선 시집 따뜻한 국물이 그리운 날(열림문화, 2021)에서

                                                              *사진 : 더덕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