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태준 시집 '가재미'의 시들(3)

김창집 2021. 9. 11. 00:09

, 24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소천小天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 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

 

언젠가 다시 가본 나의 외갓집 같은

 

산등성이 신갈나무에 빈 들 미루나무에 새들의 집이 아직 얹혀있다

여름에는 무성한 잎에 가리워져 있지만 겨울에는 저 곳이 새들의 둥지라는 걸 안다

너무 멀지는 않게 마을 근처에 여럿 손에 결은 솜씨로 지어 놓았다

 

알몸 빠알간 새끼들의 우는 소리가 없고, 공중에 발길도 끊어진

텅텅 빈, 빈집들이다

 

날개를 한번 푸덕거려 떠났어도 묵은 집 벽처럼 줄금 간 가슴은 두고 간, 언젠가 다시 가본 나의 외갓집 같은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 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 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 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바깥에 또

 

구멍이 구멍을 밀고 가는 걸 보여주는 한 마리 게

내 눈 속의 개펄을 질퍽절퍽하게 건너간다

 

진흙 수렁을 벗어나도 바깥에 진흙 수렁이 있고

을 벗어나도 바깥에 이 또 있다

 

돌집 하나 없이 우리는 의 안과 밖에서 살아갈 것이다

 

붉은 집,

축축한 노을이 우리가 머물 마지막 집이 될 것이다

 

 

                                   * 문태준 시집 가재미(문학과 지성사, 2006)에서

                                                    * 사진 : 흰배롱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