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시집 '정곡론'의 시들

김창집 2021. 9. 13. 00:04

시안詩眼

 

한 권의 시집을 세우는 것은

시집 속 수십 편의 시가 아니라

한 편의 빼어난 시다.

 

한 편의 시를 살리는 것은,

바로,

반짝이는 시의 눈이다.

 

스스로

빛나는

시의 눈빛!

 

그 눈을 씻기 위해

시인은 새벽마다

한 대접의 정화수를 긷는다.

 

당신의 는 안녕하십니까?

 

매미가 버마재비 속으로 들어가고

참새가 황조롱이 속에 들어가 산다

사자가 가젤 속으로 들어가고

악어가 얼룩말 속에 들어가 죽는다

 

요즘 시가 병이 나도 단단히 났다

말도 못하고 듣도 보도 못한다

씹도 못할 단단한 뼈다귀를

입술에 침 바르고 맛보라 한다

 

뿌리가 없는, 줄기도 잎도 없는 나무

가지도 오지도 않은 곳에 핀 곳

텅 빈 언어의 진수성찬 앞에 앉아 있는

눈썹 없는 미녀 허발하고 있다

 

시가 죽어야 시가 탄생한다

요즘 시들은 죽을 줄을 모른다

시인들은 병명을 몰라

어처구니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가을밤

 

밤을 도와 귀뚜라미

실 잣는 소리

 

실쏠실쏠 솔쏠솔쏠

목청 틔우고

 

귀를 세워 달빛 모아

베 짜는 소리

 

새벽 세 시 홀로 듣는

이승의 노래.

 

유쾌한 저녁

 

귀뚜라미 떼로 모여

귀를 뚫는다

밤새도록 귀뚤귀뚤

풀잎 음악회

둥근 달도 웃으면서

내려다보고

소슬바람 지나가며

손을 흔든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귀를 뚫는다

밤새도록 귀뚤귀뚤

꽃잎 음악회

별님들도 눈 맞추며

귀를 모으고

시냇물도 지나가며

입을 가린다.

 

독서법

 

눈이 침침해 책을 오래 볼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드디어 천 개의 눈이 열리고

귀가 만 리 밖까지 트인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책이 눈 앞에 펼쳐진다

손으로 책장을 넘길 필요가 없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책

아무리 오래 읽어도 눈이 아프지 않다

나이 들어 시력이 떨어지는 것은

책 다 덮어 놓고 책을 읽으라는

신의 뜻

자연은 갈피마다 주석이 달려 있어

오독할 염려도 없는

가장 크고 위대한 책

마음껏 읽어보는 즐거움은

나이가 거저 주는 축복 아닌가.

 

시핵詩核

 

앞을 보려거든 뒤로 걸어가라

뒤를 봐야 앞이 보인다

똑같은 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신은 같은 것을 창조하지 않았다

뒤로 공격하고 앞으로 후퇴하라

앞도 뒤고 뒤도 앞이다

과녁[貫革]을 뒤에 세워 놓고

시위 없는 효시嚆矢를 앞으로 날려라

보지 않아도 화살은 날아간다

살이 날아간 것인지

이 날아온 건지 알 것 없다

끝과 시작은 겹쳐져 있어 무겁다

무심한 바람이 발길을 흔들어 대도

물속 푸른 하늘을 새는 날고

하늘바다 높이 물고기는 헤엄친다

명중하는 표적의 울림을 위하여.

 

 

                                         * 홍해리 시집 정곡론(도서출판 움, 2020)에서

                                                         * 사진 : 이색 닭의장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