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1년 9월호의 시(2)

김창집 2021. 9. 9. 00:05

늙은 꽃

 

말티재에 와서 웃는 여자를 만났다

 

당신 속으로 들어가려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문이 열리지 않아요

 

흔들리는 꽃은 그 웃음을 닮았는데

다시 보니 두 잎만 남은 꽃은 무척 피로해 보였다

 

그렇군, 늙었구나

이제야 지친 꽃이 보이는구나

무얼 꿈꾸었나, 나의 꽃

 

말티재에서

잃어버린 꽃 하나를 주워

먼지 낀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선다

터널을 지나 구불구불 고개를

내려간다

언젠가 기절하며 내려갔던

이 늙은 고개를

 

정순영

 

아름다운 꽃은

세상에 매이지 아니하고

 

참한 것을 하여

세상에서 가장 해맑은 새벽 햇살에게 다가가

 

고난의

몸을 씻는다

 

능소화 채들

 

소화야, 담 너머로 고개 내밀지 마라

 

떠난 임은 임이 아니라 이미 남이니

 

눈멀도록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니

 

기다리다 뚝뚝 꽃 떨어지는 슬픔아

 

봐라, 봐라, 거울 좀 들여다보란 말이다

 

청춘이 통째로 지는구나!

 

소화야, 이 어리석은 사랑아

 

삶의 질 - 호월

 

팔순에 접어들며

건강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동창회보에는

부고가 줄을 잇는다

 

백세시대라고 떠들지만

건강한 삶의 나이가 중요하다

신체적으로는

아픈 곳 없고 정신이 또렷하며

인격적으로는

겸손하고 원숙한 인품에

주위를 즐겁고 편안하게 하는 사람

 

행동이 느리더라도

몸을 제대로 가누며

운전하여 홀로 서는 노년이 되고 싶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좀 서글프지만

밝게 웃으며 낙천적인 마음으로

삶의 질을 건강하게 유지해 나가는 나이가

백세이기를 바란다

양보다는 질이다.

 

하지夏至 감자 - 민구식

 

오전수업 마치고

노란 하늘 이고 타박타박 먼지 나는 하굣길

황골 고개 따비밭 감자 꽃 가득하다

 

산길 십 리 더 가려면 쓰러질 거야

날 감자, 파랗게 물든 거 먹음

배가 아플 거라 엄마가 말 했는데

형은 씨눈하구 껍질만 벗겨내면 괜찮다고 했지

 

잔디에 쓱쓱 문질러 얇은 껍질 벗겨내고

도토리나무 그늘에 앉아

아리하고 사각한 맛 우적우적 씹다 보면

또 한 놈 눈치 보며 어슬렁거리다가

감자 포기 밑구녕을 후빈다

 

자주색 물든 입술 닦으며

비밀 약속 눈짓으로 나누고

찔레 껍질 씹으며 호드기* 불며 집으로 왔다

 

밤새 시달리다 나란히 결석을 했다

 

저녁나절 담임 선생님이 먼 길을 오셨다

 

엄니는 삶은 감자 한 대접을 내 오셨다

감자하나 손에 들고 날 흘깃 보시고는 낮은 소리로

감자는 삶아서 먹어야 한단다

우째 아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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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드기- 버들피리

 

우수를 사랑하는 그 여자 - 조성례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여름내 불기 없던 남편의 방바닥에서

애첩인 양 동침을 하던 이불 속을 들추고

온 집안을 휘돌아다닌다

은근과 끈기로 기다리던 그 여자

우기를 만나

제 세상인 듯 속속들이 인사를 하러 나섰다

 

햇살 쨍 한 날 빨랫줄에 걸려서도

숨겨 놓고 있었나 보다

빗줄기를 타고 내리는 곰팡이

강한 집념의 정체를 기어이 드러낸다

틈만 나면 남편과 통정을 즐기던 그녀의

강한 지분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는다

 

울컥 올라오는 울렁증

마치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듯

방향제를 뿌려보지만

요리조리 매끄러운 춤사위로 달아난다

블현듯

눅눅한 우수를 사랑하는 그 여자

무심을 가장해 보지만

온몸에 끈적거리는 가려움만 남긴다

 

 

                                         * : 월간 우리202109399호에서

                                                     * 사진 : 누리장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