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24일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일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소천小天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 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
♧ 언젠가 다시 가본 나의 외갓집 같은
산등성이 신갈나무에 빈 들 미루나무에 새들의 집이 아직 얹혀있다
여름에는 무성한 잎에 가리워져 있지만 겨울에는 저 곳이 새들의 둥지라는 걸 안다
너무 멀지는 않게 마을 근처에 여럿 손에 결은 솜씨로 지어 놓았다
알몸 빠알간 새끼들의 우는 소리가 없고, 공중에 발길도 끊어진
텅텅 빈, 빈집들이다
날개를 한번 푸덕거려 떠났어도 묵은 집 벽처럼 줄금 간 가슴은 두고 간, 언젠가 다시 가본 나의 외갓집 같은
♧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 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 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 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 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 門 바깥에 또 門이
구멍이 구멍을 밀고 가는 걸 보여주는 한 마리 게
내 눈 속의 개펄을 질퍽절퍽하게 건너간다
진흙 수렁을 벗어나도 바깥에 진흙 수렁이 있고
門을 벗어나도 門 바깥에 門이 또 있다
돌집 하나 없이 우리는 門의 안과 밖에서 살아갈 것이다
붉은 집,
축축한 노을이 우리가 머물 마지막 집이 될 것이다
* 문태준 시집 『가재미』 (문학과 지성사, 2006)에서
* 사진 : 흰배롱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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