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남대희 시집 '나무의 속도'의 시들

김창집 2021. 9. 17. 00:14

거미줄 바라보다

 

회화나무 가지 사이,

허공이다

허공이 길목이다

바람과 햇살이 노니는

날개 있는 것들이 오가는

 

허공을 판다

길목에 함정을 판다

능란한 솜씨로

허공에 허방을 놓고

투명 실로 견고한 그물을 치고

파닥거리는 날개의 진동을 기다리며

온몸 촉수 곤두세운

포식자의 영역

 

저 황홀한 함정을 바라보면서

목젖까지 넘어온 찬란한 언어들을

뽑아내어

또 다른 허방을 만들어 놓고

공허한 가슴들을 포획하려는 시도를 해보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허방 위로

금빛 햇살 허우적거리고

발목 걸린 바람만 뒤뚱거린다

 

들국화꽃차

 

물기 하나 없이 바스스 말렸습니다

지난 가을 쑥부쟁이와 마지막 인사를 한 후

불판에 덖어지는 고통도 견뎠습니다

 

투명한 다완의 곡선이 매혹적입니다

따끈한 물이 부어지면 난 기억해 낼 것입니다

눈부신 햇살 영롱한 이슬

벌 나비의 열정적인 몸짓과

시리도록 푸른 하늘

시시각각 그림을 바꿔 걸어주던 구름과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들던 바람과

불타던 가을산과

누렇게 고개 숙인 벼와 허수아비

주름 굵은 농부의 땀방울까지

모두 기억해 내겠습니다

 

이 기억들과 내 마지막 향기까지 그대의

달콤한 입술로 짜릿한 혀끝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스미겠습니다

 

아득하다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면

참 아득하다

아득한 하늘은 허공으로 꽉 차 있고

산 능선과 하늘처마가 서로 맞물려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동기동기 배회하는 조각구름들

고비에서 비장하게 몸 일으킨 모래 알갱이들

날개 펴 조심스레 길을 내는 새떼들

높다란 건물 옥상 피뢰침 하며

이것들이 허공의 무늬일 수도 있고

 

천둥 번개는 하늘이 제 몸 흔들어

촘촘한 허공을 한 번씩 간추려 보는 것

 

저 하늘은 내 마음 들여다보고

아득하다 말하려나

심연 가득한 장미꽃 향기와

구름같이 피어오르는 온갖 상념

최루연기 자욱한 거리에서 포효했던,

여자의 속살에 가슴 데였던 시절이

무늬로 남아 있는 내 마음속 하늘

허공처럼 아득할까

 

내가 아득한 하늘을 가끔 올려다보는 것은

마음속 쌓여가는 무늬들 하나하나 지워 보는 것

 

가을 대청호

 

여름을 건너면서 호수는 순해졌다

변덕스런 하늘을 품느라 물빛은 더욱 짙어지고

흐름을 멈춘 수면이 거품을 물고 있다

미루나무가 허공을 끌어와 꼭짓점을 세워 보지만

하늘은 여전히 아득하다

물푸레가 동면한다는 계곡을 달리면서

마음만 바빴던 날들이 가파르게 남아 있다

간혹, 하늘의 연서를 빼곡히 받아 적다가도

한줄기 소나기일 뿐임을 앎으로

둥글게 둥글게 지워 나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수직을 벗어난 미루나무 잎의 평온한 배영, 그 아래로

수몰된 누군가의 고향이 출렁거리고 있다

 

호수가 환한 등줄기를 곧추세우고

노을 속으로 걸어간다

 

*반구대암각화

고래

 

1

 

반구대에서

수백 마리의 고래가

돌덩이에 갇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본다

사막을 걷는 낙타가

모래알 같은 시간을 걸으며, 잔등에

산맥 같은 물주머니를 만들어 낸 것 같이

숨을 모양으로 쉬는 법을 익혀낸

그들의 모습이 암각화로 새겨져 있다

 

2

 

하늘이 바다를 지그시 누르는

수평선

네 발을 포기한 저들

회한의 한숨이 물기둥으로 솟아오르는 뒤로

밟고, 밟히는 발 있는 것들의

어리석은 욕심이 검은 파도와 함께

출렁거리고 있다

 

 

                            * 남대희 시집 나무의 속도(우리시인선 032, 201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