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시집 '정곡론'의 시들(2)

김창집 2021. 9. 20. 00:18

한 줌의 비애

 

때 씻어낼 두 말의 물과

마음 닦을 비누 일곱 개의 지방과

글 쓸 연필 아홉 자루의 연과

정신의 방 한 칸을 바를 석회와

불 밝힐 성냥개비 2,200개의 인과

방 소독할 DDT를 만들 유황과

뼈 흔들리지 않게 칠 못 한 개의 철로

평생을 수리하며 사는,

 

무한임대로 빌려 살고 있는 집과

빨아 널지 못하고 입고 사는 옷과

남은 향으로 싸목싸목 지는 꽃과

쓰다 말고 놓아둔 미완성의 시와

길 없어 길 찾아 홀로 가는 길인,

 

, 나의 몸이라는

한 줌의 비애여!

 

연필로 쓰는

 

이슥한 밤

정성스레 연필 깎을 때

창밖에 눈 내리는 소리

연필을 꼭꼭 눌러 글씨를 쓰면

눈길을 밟고 다가오는

정갈한 영혼 하나

하늘이 뿌리는 사리 같은 눈

발바닥으로 문신을 박듯

사각사각 사각사각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어느새 희번하니 동이 트고

냉수 한 대접의 새벽녘

드디어,

하얀 종이 위에 현신하는

눈매 서늘한 한 편의 .

 

고독한 하이에나

 

고독한 하이에나 한 마리

순식물성인 내 마음속에 살고 있다

미친 여자의 웃음소리를 내고

기분 나쁜 비웃음을 흘리는

포유류 식육목의 청소부 하이에나

밤새도록 세렌게티 평원을 홀로 헤매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다 깨곤 하는

외로운 하이에나

한다하는 턱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상상과 공상과 망상의 뼈

물고 뜯고 깨물다 그만 지쳐버린

은빛 하이에나의 굶주린 울음소리

처절한 하이에나는

꿈속에서도 썩은 고기와

사자가 먹다 버린 뼈다귀를 찾아

날이 하얗게 샐 때까지 안 가는 곳이 없다

아침 해가 새빨간 혀를 내밀 때

살코기인 줄 알고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석 달 열흘 굶은 하이에나 껄떡대는 소리

아작아작 씹어대는 저 단단한 이빨과 턱

새벽잠을 잊은 나의 귀여운 하이에나는

백지 평원을 겅중거리며 헤매고 있다

명상의 맛있는 살코기를 찾아서.

 

자기 또는

 

흙인 남자 물인 여자 서로를 다 녹이고 사뤄, 드디어

온몸이 클리토리스인 자기가 된다

 

눈빛만 닿아도 소리치고 손길 닿으면 자지러지는

너는 나의 비어 있는 호수

 

청자의 비색이나 백자의 순색으로 영원을 얻은

너는 나의 혼을 연주하는 바람의 악기

 

늘 내게 담겨 있어도 나는 가득 차지 못하는 하늘이어서

빈 마음으로 마른 입술을 내게 묻노니.

 

사물미학四物美學

 

둥둥 두둥둥 구름 흘러가는 소리

따닥따닥 따다닥 떨어지는 빗소리

징징 지잉징 바람은 울고

깨갱깨갱 깽깽깽 번개치던 날,

 

한판 벌인 굿판이 흠뻑 젖은 것은

오십 년만이었다고 한다

북과 장구와 징과 꽹과리

사물은 하나, 한 편의 시였다.

 

허수아비

 

나이 들면

그리움도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 들면

무서운 것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막상 나이 들고 보니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빈 들녘에 홀로 서서

낡은 옷자락만 바람에 흐느낍니다

 

그래도

마음은 가득하니 짜장 부자입니다.

 

 

                                 * 홍해리 시집 정곡론(도서출판움, 2020)에서

                                 * 사진 : 추석 가까운 날, 제주 하늘과 구름(2021.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