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점묘-4 - 호월
어두움, 나이 타령, 거드름, 노욕, 불평, 비관적
찌푸린 얼굴, 꾀죄죄, 고집, 본능형, 과거 회귀
컴맹, 운동 부족, 배움 기피, 무취미, 반말, 무례
정신까지 늙은 사람, 늙다리
밝음, 미소, 말쑥, 미래 지향적, 베품, 낙천적
다양한 취미, 배움, 예의, 겸손, 사유형, 협조
봉사, 나눔, 경청, 유머 감각, 존대, 인품, 독립
정신은 젊은 사람, 노신사
선택은 우리 몫
♧ 감자를 깎으면서 – 민구식
열 살 초여름
마냥모* 심으러 간 아부지 새참거리
감자 한 바가지
무딘 칼로 얇게 깎기도 어려운데
알몸 감자가 자꾸 손을 빠져나간다
깎고 나니 배꼽이 쏙 들어가 있어서
도려내야 할지 베어내야 할지
머뭇거리는데 엄니가 한 말씀 하신다
다 지 살려고 싹은 깊게 숨겨놓은 거겠지
어쩌것냐 도려내야 안 허것냐
배꼽 먼저 도려내고 깎아야 쉽제
그라고 감자 배꼽은 해를 받으면 푸른 독을 키우지
못된 놈 동지冬至에 싹 난 감자 같다고들 안 허냐
아까워도 사정없이 베 내거라
사람이나 감자나 지 몸 갈무리를 잘해야 하는 것이여
나는 괜시리 뜨끔하니
똥구녕이 근질거렸다
♧ 연꽃 – 여연
연꽃은 진흙탕에 핀다
진흙탕 더럽다고
피하는 사람들 있다
연밭을 환하게 밝힌
미소들 보라
얼마나 숭고한 물인가
♧ 전단지 - 박덕은
여자는
음식점 전단지를 집집마다 뿌린다
친절하고 정중한 각도의
고딕체 문구들이 손님을 모신다
수없이 이력서 들고
현기증 타고 오른 계단,
그 끝에서 신장개업을 알린다
한 번도 그 식당의 요리를
맛본 적 없는 녹색 테이프가
혀를 꿰뚫는 미각을
종잇장에 꽂아 집집마다 들른다
당신도 왕이 될 수 있다며
메뉴판에 적힌 지름길을 안내하고
365일 공주처럼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배꼽에 두 손 모은다
여자가 축하 화분처럼 활짝 웃는
화려함 한 장을 동네 이마에 붙이자
서먹서먹한 4인 가족의 행복이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길을 걷는 남녀가 어질어질한 단맛에 취해
쓰디쓴 기억도 잊은 채 팔짱 끼고
맥이 풀린 일상이 번쩍 고개를 든다
흥이 차오른 저 강력한 접착력은
마을의 뱃속에 들러붙어
군침을 흘리게 한다
엄마의 손맛으로 코팅해
모든 입에 맞다는,
여자의 허기가 도사린 밥상에도
안성맞춤일 것 같은
저 음식
까탈스런 입맛도 사로잡아
배부르게 할 수 있다는 홍보물이
골목의 빈 장기臟器를 채운다
여자가
생의 어느 좌표 같은 철문에 손을 대자
전단지가 찰싹 들러붙는다.
♧ 소실점消失點 - 조온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길이 없는 건 아니네
그대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듯
살아가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찾는 것
사람마다 갈 길이 다르고
벼랑에도 길 있어
오늘도
길에서 길을 찾는 그대
*월간 『우리詩』 2021년 09월 399호에서
*사진 : 제주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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