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군칠 시집 '수목한계선'의 시(1)

김창집 2021. 9. 15. 17:31

시인의 말

 

수평선은 하나의 한계선이다.

수평선을 넘으면 또 다른 한계선이 있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수평선까지 갔다가 항상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엎드린다는 것은 결코 굴신이 아니라

내공을 더욱 단단히 하는 것이다.

나는 수평선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의 시 또한 저 수평선 안에 갇혀 있길 바란다.

 

이미 내 이마에는 몇 개의 수평선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2003.8.

모슬포에서

 

 

서늘한 정신

 

천 길 물길을 따라온 바람이 서느러워

바닷가에 나와 보네

앙상한 어깨뼈를 툭 치는 바람은

저 백두대간의 구릉을 에돌아

푸른 힘 간직한 탄화목을 쓰다듬고

회색잎 깔깔거리는 이깔나무 숲을 지나

황해벌판을 떠메고 온 전령이려니

지난날, 그대

비 갈기는 날의 피뢰침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서는

혀를 감춘 하늘을 물어뜯어

만경들의 물꼬들을 차례차례 깨우고

나지막한 산을 넘을 때

누렁쇠 쇠울음으로 회오리도 쳤을 터

그대는 지나는 풀밭

풀자락들은 흔들려 불꽃으로 일고

그 불길이 몰려오는 섬 기슭에서

나 오늘, 서늘한 정신 하나를 보네

 

 

풀물

 

포근히, 눈처럼 비가 내리더라구요

보지 못했지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는 걸

차라리 쫘악쫙 갈기는 비였다면

감히 거리로 나설 엄두나 냈겠어요

겨드랑이에서 나는 간지러운 바람 소리에

슬쩍 집을 나섰지요

촉촉하게 젖은 겨울나무의 속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라구요

나긋나긋하고 뭐냐,

첫날밤 아내의 콧소리 같은

그런 소리더라 말입니다

, 글쎄 몸이 근질근질해 오더라구요

비오는 까만 밤에 뵈는 게 뭐 있겠어요

코를 벌름거리며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서는데

눈앞이 번쩍! 갑자기 환해지더라구요

겨울나무 속에서 서행이라는 간판도 무시한

봄이란 놈이

쌍 라이트를 켜고 달려들지 뭐예요

피할 겨를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지요

보세요. 정신없이 이마에 풀물이 들었잖아요

 

 

들어갈 집이 없다

 

  어둠이 죽음처럼 내걸린 거리를 걷는다. 하얗게 겁에 질린 네온사인 속에서 번들거리는 유리의 집들이 흔들린다. 굶주린 바람은 끝이 어딘지 모르는, 지린내 나는 골목에서 불어오고 수의를 걸친 유리벽 속의 마네킹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네킹의 눈에 비친 거리의 밑을 들추는 바람의 손이 거칠다. 24시 편의점 귀퉁이. 사람들의 눈을 유인하던 광고전단이 가볍게 날아오른다. 푸르스름한 빛이 흐르는 거리로 마른기침을 쿨럭이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유리벽을 나온 마네킹이 푸른빛을 진 채 사람들 틈으로 슬그머니 끼어든다.

 

  이 도시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굴절을 배우지 못한 저 빛들은 날마다 연습으로 끝나는 노래를 부르며 어제와는 또 다른 낯선 번지의 집으로 스며든다. 내가 들어갈 집이 어둠 속에 웅크린 채 깨어날 것 같지 않은 꿈을 꾸고, 순간마다 색을 달리하는 네온사인 속에서 내 집이 흔들린다. 길들이 몸속으로 국숫발처럼 빨려든다. 길가에 매달렸던 내 집의 문들이 빨려들고 집이 빨려든다. 몸이 무겁다.

 

 

, 견뎌내다

 

  밤을 달려 너를 만나고 온 아침,

  죽은 나방의 흔적을 지운다.

 

  밤길은 끝이 보이지 않고, 차창에 매달린 바람은 날선 칼끝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너를 향한 한 가닥 그리움, 전조등은 어둠의 내장을 가르며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속도계의 바늘 속으로 나방이 달겨들었다. 가차 없이,

 

  凹凸 부분의 길을 지날 때 밑도 끝도 없이 굽이지던 삶이 출렁거렸다. 길의 권태가 끝나는 곳마다 가드 레일은 계율처럼 웅크려 터무니없는 흥정을 요구해 왔다. 그때마다 가늠해야 할 방향이 무너져 내렸다. 때론 바튼 숨결을 헐떡이며 끌려가기도 했다. 직선을 고집하는 불빛을 좇아 아득한 어둠 속에서 뛰어들던 나방, 세상의 암유리를 들이받고 싶다는 생각, 생각은 항상 착시현상 속에서 조각났다.

 

  몽유의 밤이 끝나고 대적의 아침이 밝아올 때, 으깨어진 몸통이 쓸려나간 자리에 달라붙어 있는 몇 개의 까만 점. , 죽어가며 슬어놓은 나방의 알은 아닐까. 고치 속처럼 안전지대에 들어앉은 알들이 내 몸 속에서 꿈틀거린다. 무섭게 견뎌내고 있다.

 

 

보성리 수선화

 

보성리* 연못가를 지날 때마다

머릿발 곤두서는 찬 기운을 만난다

하늘을 밟고 오는 소나무의 그림자가

적막한 마을길을 자빠뜨린다

숭숭한 돌구멍,

경계를 넘나드는 바람은

저승의 그리움을 머리째 끌고 와

돌담 아래 수선水仙을 피워낸다

 

가슴을 확확 불 지른 하얀 등

 

골목을 호령하는 바람 끝으로

어디서 본 듯하다

봉두난발이나 꼿꼿이 허리 세운

추사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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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리 : 제주도 대정읍의 작은 마을. 추사 김정희의 적거지가 있다.

 

 

                                   * 정군칠 시집 수목한계선(한국문연, 2003)에서

                                         * 사진 : 시에 자주 등장하는 순비기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