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군칠 시 '광명사의 새벽' 외 4편

김창집 2021. 9. 22. 00:27

광명사의 새벽

 

낡을 대로 낡아 더욱 가벼워지는

법당의 계단, 몸을 기댄다

간밤 별들을 가슴으로 안은 망초꽃들이

더러 마음 주어 나를 쳐다본다

나도 이슬로나 피어 어머니의 가리마에 내려앉고 싶다

볼을 어루만지는 바람결 따라

적막 속 영단으로 걸음을 옮길 때

홀연한 나비 한 마리,

어머니 하얀 치마가 펄럭인다

나 어린 배꼽의 때를 씻어내던

유백색 흔적 없는 자리

인간의 새벽뿐인 그 자리로

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눈의 사막

 

눈 덮인 산길 걷다보면 안다

누가 나보다 먼저 걸어갔는지

초승달 모양의 사구들이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

사막, 수많은 사구의 그림자 안에 알몸인 내가

웅크려 있다 잔물결을 이루며 깊이 잠든 나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달콤한 잠을 깨울 수 없어

한 발자국 더 내딛지 못할 때

아득해진 정신 위로 쏟아져 내리는 여우별

알몸의 주름들이 서서히 펴지며

내가 지워진다

눈 덮인 산길을 걷다보면 안다

사막을 걸어온 메마른 시간들 위로

새로이 발자국을 만드는 바람

거기 내가 홀로 서 있다

 

어머니 바다에 비는 내리고

 

비 오는 날 바다에 갔다

바다는 비에 젖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바다에 갔다

나는 바다에 흠뻑 젖었다

개들이 하얀 이빨을 내밀며 달려왔다

 

잘 나오지 않는 젖을 물린 어머니

개들이 내 구두를 물어뜯었다

 

비 오는 날 바다에 갔다

어머니의 바다에 비는 내리지 않았다

개들이, 하얀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내게 달겨들었다

 

원담

 

  썰물인 해거름의 바닷가

  산수경석을 고르다가

  원담*에 갇힌 한 마리 물고기를 본다

  비늘을 겨우 적실만큼의 홈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물고기와 내 눈이 마주친 순간

  잠시 바르르 떨리는 잔물결의 파동을 본다

  그 위로 더 붉은 햇살이 내려앉는다

 

  호시절, 사내는 담을 쌓고 또 쌓았을 것이다 큰 파도가 밀려와 무너뜨리는 세월의 궤적도 얹었을 것이다 섬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어 바다를 등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구멍을 빠져나간 어린 새끼들의 몸집이 부풀어 외면할 때까지 견고한 꿈이 쌓아올려졌을 것이다 다시 밀물지기를 기다리며 비늘이 떨어져나간 상처를 기웠을 것이다

 

  꿈뻑거리는 물고기의 눈으로 고개를 드니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사각형의 무덤 하나

  완강한 고집처럼 겹담을 두르고 있다

  볼모가 된 사내

  편안하신가 안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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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 :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쌓아놓은 담.

 

모슬포에는 모래바람이 분다

 

뒤척이는 바다가 허연 소금기를 털어내는 마을

모슬포에는 모래바람이 분다

바다로 가는 사람들의 고개가 꼿꼿이 들려 있다

산탄散彈으로 박히는 모래알갱이

눈으로 스며든 모래바람마저 그들에겐

버거운 삶을 지탱하는 추가 된다

 

먹장구름이 주거의 길을 가릴 때

저 산,

허리에 암굴* 파내어 격납고 들여앉힌 상처

피멍든 곡괭이 소리에 혈을 빼앗기던

그날의 두려움이 아직도 아프다

그 아픔 전하고자 산은,

깎아지른 벼랑에 괭이갈매기 키워

어제는 하늘의 처마 밑에 물새알 몇 개 묻고

구멍 숭숭 뚫린 산자락을 찾아온 깃털들로

적층을 이루게 한다

 

오늘도 모슬포엔 모래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오는 곳을 향해 꼿꼿이 고개 쳐든

저 괭이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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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중반을 치닫자 일본은 미 해군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하여 해안 곳곳에

인공동굴을 만들어 어뢰정과 병력을 은닉시켰다. 바다에 뿌리내린 송악산에는 넓이 3~4미터, 길이 20미터의 동굴이 15개나 뚫려져 있다.

 

 

                                    * 정군칠 시집 수목한계선(현대시, 200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