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아이를 낳아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다 헐은 자궁으로
수국이나 박태기나무
여치나 개똥지빠귀 같은
살려내는 우주를
낳고 싶습니다
♧ 고매古梅에 취하다
밭뙈기 팔아 들여온 쌀가마에서
고방 항아리로 쌀알들 쏟아지는 소리
햇살이 몽글다
어깨가 좁았던 사람
착해서 가난해진 그 사람의 몸에서 나던 살냄새
바람이 여물 먹은 소처럼 순해진다
몸이 검다는 것은 울음이 많이 쌓였다는 것
청산초 잎이 어린 쥐의 귀처럼
쫑긋하다
탈출구 없는 향기의 감옥
멀리 왔다 했으나
여전히 묶였다
온갖 소리 다 스민
저 아래에서
도대체 뿌리는
얼마나 많은 귀일까
♧ 비가 오신다
서울이나 광주에서는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비가 온다는 말은
장흥이나 강진 그도 아니면
구강포쯤 가야 이해가 된다
내리는 비야 내리는 비이지만 비가
걸어서 오거나 달려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어떨 때 비는 싸우러 오는 병사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그 병사의 아내가
지아비를 전쟁터로 보내고 돌아서서
골목길을 걸어오는
그 터벅거림으로 온다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새색시 기다리는 신랑처럼
풀 나무 입술이 보타 있을 때
산모롱이에 얼비치는 진달래 치마로
멀미나는 꽃내를
몰고 오시기도 하는 것이다
♧ 애월에서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 열이 오르다
개나리꽃이 병아리 부리 같다는 것은
새삼스런 생각이 아니다
보이는 꽃마다 새 부리가 박혔다
참새 부리 같은 별꽃 딱따구리 부리 같은
산자고 오리 부리 같은 목련
꽃이 부리는 한사코 제 몸을 향해 있다
뒤란에 매화향 가득하다
참 많이 앓았겠다
♧ 낯익은 빗방울
처음 밥 짓기 시작 했던 건 여덟 살 때
어머니 논일 가시면 가마솥에 밥 안치고
가래나무로 불을 때면 싸게 인 불이 화르릉 타오르고
넘는 불 부지깽이로 다독이다 보면
솥뚜껑 아래로 주르륵 흐르던 눈물
색도 희멀건 그 밥물을 왜 눈물이라 했을까
살면서 날마다 오장육부 채우는 게
눈물 강 지나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밥 잘 짓는 솜씨는 녹슬 틈이 없고
혼자 먹는 밥은 서럽다는데 그거야 이력이 덜 붙은 탓
귀한 목숨 하나 위해 밥하고 반찬 만드는 것이
내 안에서 나를 낫게 하고 아프게 하시는
백조* 개, 아니 백조 분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잘 살자, 잘들 사시라, 나여
밥통에 오래 있어 꼬들꼬들해진 밥 있으면 끓여먹곤 하는 거
내 입으로 오신 그 씨앗들 고맙고 눈물 나서
우리들 언제 함께 파도로 출렁이면서
윗물 아랫물 뒤섞이기도 하면서 다순 손 맞잡으며
백조 명의 만찬을 생각해 보면
하늘에선
반가워! 반가워! 손 흔들며
활짝 활짝 낯익은 빗방울도 몇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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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우리 몸속 미생물의 수를 100조 개 정도로 추정한다.
*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 (창비, 2010)에서
* 사진 : 솔체꽃과 솔체꽃에 심취한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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