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도화油桃花
너를 보내고 돌아오는 공항로에
독성 강한 꽃 낱낱이 만개했다
그 길 천천히 지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저들이 서둘러 고개 숙인다
아,
내 안에
이렇게 지독한 사랑이 숨어 있다니!
♧ 가래나무섬*에서의 하룻밤
산등성이를 내려온 안개가
사자바위를 집어삼키더니
밤새 가로등 흔들리고
지붕을 넘는 바람소리
마른 가슴 헤집고 간다
학교 운동장에서 야영하던 아이들
그 재잘거림도 흩어지고 없다
가래나무섬에서의 하룻밤
관사官舍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밤잠 잊고 새벽을 맞는다
간밤 섬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바람은
뱃길마저 뚝 끊어놓았다
이따금 바람의 잔해만 앙상하게 오갈 뿐
그리워도 오지 못하고
외로워도 가지 못한다
하릴없이 소주병에 몸을 기댄다
아직 그대에게 다가설 시간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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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 해장국
열불 나면 걷잡을 수 없는 거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쯤이면
날계란 하나로는 어림도 없는 거라
김칫국물 정도로는 턱도 없는 거라
그럴 때면 막걸리나 한 잔 하면서
가만 놔둬야 하는 거라
그러면
씩씩거리다가도
제 스스로 몸 낮추고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는 거라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거라
사랑도 그런 거라
분노도 다 그런 거라
♧ 눈색이꽃*
절물 가는 삼나무 길
밤새 내린 눈을 이고 선 어깨가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새벽에 내린 눈과 함께
이미 다녀간 물지개 바퀴
그 흔적이 남긴 상처 따라
물 맑은 소리 찰랑인다
마음만 먼저 와버린 탓일까
사방지천 눈에 밟히던 꽃
코끝에 흙내 물큰 맡아지도록
허리 굽어 살펴보아도
눈에 파묻혀 끝내 보이지 않고
---
*복수초의 다른 이름
♧ 비는 소리가 없다
정작 비는 소리가 없다는 걸
이대도록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늘 어드메쯤에서 길 떠나
지상 어딘가에 닿을 때까지
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걸
내 가슴이 텅 빈 후에야 알았습니다
비에도 길이 있어 그 길 따라
바다에 닿으면 파도소리가 되고
키 큰 나무에 내리면
푸른 나뭇잎소리가 되고
더는 낮아질 수 없는 개울에 닿으면
맑은 물소리가 된다는 걸
그와 헤어져 인사도 없이 돌아선 날
내 가슴으로 내리는 빗줄기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는 것 알았습니다
♧ 지삿개에서
그립다,는 말도
때로는 사치일 때가 있다
노을구름이 산방산 머리 위에 머물고
가파른 바다
어화漁火 점점이 피어나고
바람 머금은 소나무
긴 한숨 토해내는 순간
바다 끝이 하늘이고
하늘 끝이 바다가 되는 지삿개에 서면
그립다,라는 말도
그야말로 사치일 때가 있다
가냘픈 털뿌리로
검은 주검처럼 숭숭 구멍 뚫린
바윗돌 거머쥐고
휜 허리로 납작 버티고 선
갯쑥부쟁이 한 무더기!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 (애지, 200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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