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의 시(1)

김창집 2021. 9. 29. 00:11

유도화油桃花

 

너를 보내고 돌아오는 공항로에

독성 강한 꽃 낱낱이 만개했다

그 길 천천히 지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저들이 서둘러 고개 숙인다

 

,

내 안에

이렇게 지독한 사랑이 숨어 있다니!

 

가래나무섬*에서의 하룻밤

 

산등성이를 내려온 안개가

사자바위를 집어삼키더니

밤새 가로등 흔들리고

지붕을 넘는 바람소리

마른 가슴 헤집고 간다

학교 운동장에서 야영하던 아이들

그 재잘거림도 흩어지고 없다

 

가래나무섬에서의 하룻밤

관사官舍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밤잠 잊고 새벽을 맞는다

간밤 섬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바람은

뱃길마저 뚝 끊어놓았다

이따금 바람의 잔해만 앙상하게 오갈 뿐

그리워도 오지 못하고

외로워도 가지 못한다

하릴없이 소주병에 몸을 기댄다

 

아직 그대에게 다가설 시간이 아닌가 보다

 

---

*추자도

 

해장국

 

열불 나면 걷잡을 수 없는 거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쯤이면

날계란 하나로는 어림도 없는 거라

김칫국물 정도로는 턱도 없는 거라

그럴 때면 막걸리나 한 잔 하면서

가만 놔둬야 하는 거라

그러면

 

씩씩거리다가도

제 스스로 몸 낮추고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는 거라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거라

 

사랑도 그런 거라

분노도 다 그런 거라

 

 

눈색이꽃*

 

절물 가는 삼나무 길

밤새 내린 눈을 이고 선 어깨가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새벽에 내린 눈과 함께

이미 다녀간 물지개 바퀴

그 흔적이 남긴 상처 따라

물 맑은 소리 찰랑인다

마음만 먼저 와버린 탓일까

사방지천 눈에 밟히던 꽃

코끝에 흙내 물큰 맡아지도록

허리 굽어 살펴보아도

눈에 파묻혀 끝내 보이지 않고

 

---

*복수초의 다른 이름

 

비는 소리가 없다

 

정작 비는 소리가 없다는 걸

이대도록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늘 어드메쯤에서 길 떠나

지상 어딘가에 닿을 때까지

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걸

내 가슴이 텅 빈 후에야 알았습니다

 

비에도 길이 있어 그 길 따라

바다에 닿으면 파도소리가 되고

키 큰 나무에 내리면

푸른 나뭇잎소리가 되고

더는 낮아질 수 없는 개울에 닿으면

맑은 물소리가 된다는 걸

그와 헤어져 인사도 없이 돌아선 날

내 가슴으로 내리는 빗줄기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는 것 알았습니다

 

지삿개에서

 

그립다,는 말도

때로는 사치일 때가 있다

노을구름이 산방산 머리 위에 머물고

가파른 바다

어화漁火 점점이 피어나고

바람 머금은 소나무

긴 한숨 토해내는 순간

바다 끝이 하늘이고

하늘 끝이 바다가 되는 지삿개에 서면

그립다,라는 말도

그야말로 사치일 때가 있다

 

가냘픈 털뿌리로

검은 주검처럼 숭숭 구멍 뚫린

바윗돌 거머쥐고

휜 허리로 납작 버티고 선

갯쑥부쟁이 한 무더기!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애지, 200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