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시집 '정곡론'의 시들(3)

김창집 2021. 9. 28. 00:01

우물 또는 샘

 

샘은 몸이라곤 오직 속뿐이라서

안에 안고 있는 것이 물뿐이어서

물로 속을 칠 수밖에 없다

일년에 몇 번 벗을 것도 없는 몸을 씻으려면

물을 품고 물로 속을 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속이 썩어 속물이 되니

무른 물로 안을 품으면서 치고

속을 치면서 품어내는 것이다

샘은 몸이 하늘이고 바다다

샘을 품는 날이면

부정 탄 것 없는 사내들이 모여

우물을 쳤다

물은 아래로아래로 흘러가지만

샘에서는 위로위로 솟는 것이 제 일이라서

물은 끊임없이 몸을 세우는 것을 제일로 친다

샘은 하늘의 소리를 듣는 귀와

말없이 대답하는 입을 가졌다

샘은 가장 위대한 어미라서

두레박이 오르내릴 때마다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을 하나씩, 하나씩

두레박에 몰래 담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샘을 품고 우물을 치듯

우리도 가끔은 몸을 치고 품어

우주를 가슴속에 안고 기를 일이다

치는 법이 없는 우물 또는 샘처럼.

 

여자

 

1.

너는 차가우나 따스하게 어는 아이스크림,

캄캄한 희망이다.

 

따스하나 차가웁게 녹는 아이스크림 너는,

새하얀 절망이다.

 

2.

너는 안에 들어와서도 만 리 밖 소식

밖으로 서성이면서도 지창 안 촛불

대낮에도 캄캄한 밤중

아니면 갈증

늘 비어 있는 잔인 나를

부질없음으로 가득 채우는 너!

 

보리누름

 

밤느정이 흐벅지게 늘어졌던가?

 

젖은 몸이 느적느적 스며들던가?

 

쏙독새가 쏙쏙쏙쏙 울고 있던가?

 

보름달이 구름 뒤에 숨어 있던가?

 

몸을 바치다

 

몸을 바친다

몸을 준다는 게 무엇인가

사는 것이 몸을 파는 일

몸을 사는 일이니,

어미는 자식에게 몸을 주고

아비는 한평생 몸을 바친다

어제는 밥에게 몸을 팔고

오늘은 병에게 몸을 준다

그는 돈에 몸을 사고

너는 권력에 몸을 바친다

술집거리에서

웃음을 팔고

몸을 주는 사람들 욕하지 마라

돈을 받고 몸을 팔았다

몸을 샀다고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바람은 스쳐 지나가고

물은 흘러가면 그만이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그대는 웃음으로 몸을 팔지 않는가.

 

개나리꽃

 

개나리 마을에 가면

지하 깊숙한 암흑 속

구릿빛 사내들

금 캐는 소리.

 

지상의 따뜻한 한때

눈빛 고운 처녀애들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금빛 웃음소리.

 

 

하늘을 안고

땅을 업고

무한 공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날아도 날아도 제자리였다

 

겨울이었다

 

꽁꽁얼어붙은세상에서시인이라는

수인명패를달고있는사람들이비명을

치고있었다바락바락발악을하고있었다

모두가꿈을꾸고있는지도모르고있었다

 

날개가 너무 무거웠다.

 

 

                                           * 홍해리 시집 정곡론(도서출판 움, 2020)에서

                                                                * 사진 : 진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