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윤숙 시집 '가시낭꽃 바다'의 꽃시

김창집 2021. 9. 30. 00:06

피뿌리풀

 

나에게 오는 길도

저렇듯 툭 끊겼으리

철마가 멈춰있는 월정리에 와서는

그리운 이름 하나가 철조망에 녹슨다.

 

625 때도 그랬지

부산 제주만 남았지

지금 막 수혈이 끝난 제주 땅 피뿌리풀*

나 이제 가지 못하네, 물러서지도 못하네.

 

꽃은 한 잎 한 잎

간이역이 아니었나

망원경에 사라져간 북녘마을 점 하나

그 마을, 하나씩마다 피가 돈다 저 뿌리.

 

---

*피뿌리풀 : 제주도에만 있는 멸종위기의 야생화.

 

상사화 1

 

그리다 그리다 지쳐 미움으로 앓고 있다

한 모금의 이슬조차 삼킬 수 없는 그대

 

지는 해

따라서 지던 그리움을 땅에 묻다.

 

사랑은 지척 같지만 별만큼 아득한 것

인연의 톱니바퀴 헛딛는 상사화야

 

또 피어

잎 진다해도

그래, 네가 보고 싶다.

 

각시붓꽃

 

올봄엔 각시붓꽃도 폐경기였나 보다

광이오름 골짜기가 집 몇 채 흘려놓고

팍팍한 흘천변 건너 작은 붓대 움켜쥔다

 

비닐하우스 한 편에 몰래 날아든 종달새

극락조 잎줄기 사이 둥지 하나 세를 내고

갓 낳은, 몇 줄 시 같은

새알들을 품고 있다.

 

나는 이제 써야 한다

붓꽃도 각시붓꽃

간밤 꿈엔 오랜만에 어머니 찾아와서

이 세상 못다 쓴 일기 청보라로 피워낸다.

 

산수국

 

기도처럼 피어나는 유월 숲 젖은 꽃들

장맛비 기다려 쪽빛으로 물들고

몸 낮춰 옷깃 세우면 그대 향기 고인다

 

열엿새 기운 보름 끝을 잡고 열린다

인연의 뿌리 찾아 거슬러 오르면

산하나 묻어둔 가슴 발밑으로 잠긴다

 

천 년의 그 약속 기다림에 나선 길

저 바다 거친 파도 산자락 끼고 도는

날 세운 호미 자루에 휘감기는 뿌리로

 

보인다, 성서 속의 그 별이 보인다

내 온실 묘판 위에 잘 자란 불빛으로

숟가락 마지막 온기 꽃잎 새에 맺힌다

 

들국 11

 

부처 찾아 떠나는 티벳고원 사람들처럼

걷다가 엎드리고

엎드렸다 다시 가는

 

제주도

천백도로엔 순례자의 길이 있다

 

들국도 십일월엔 포탈라궁 그 불상들 같다

그리움도 거르지 못한 쳇망오름 기슭에서

 

보았네, 몸을 낮춰야 풀려나는 길 하나

 

목부용꽃

 

봄은 참 멀리서 돌고 돌아서 왔네

한 세월 오름 한 자락 끌어안은 목부용

딱지로 접은 만행자

또 전하려 내가 왔네

 

그때도 이른 봄날, 눈발이 얼비쳤지

칠성통 제일극장 목조건물 돌아들면

숙부의 속잎 핀 사연 건네받던 그녀의 손

 

사십 여 년 빛바랜 총천연색 영화처럼

나는 공범자였네, 얼결에 공범자였네

아홉 살 비밀 하나로 콩콩 뛰던 새가슴

 

허술한 그 약속도 꽃처럼 씨방은 남아

이제 나도 그 나이 바람결에 접어본다

지천명, 이 못난 그리움

지금 당장 가시라

 

 

                                    * 김윤숙 시집 가시낭꽃 바다(고요아침, 2007)

 

 

   [필자의 변] 모처럼 책장을 정리하다가 쪼그려 앉아 옛날 시집들을 펼쳐 본다. 15년 전쯤 펴낸 시집들인데,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순수한 맛이 있다. 앞으로 얼마간은 가끔씩 찾아 읽을 것이다. *시인이 주를 단 피뿌리풀에 대해선 많이 찾아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30년 전쯤 백약이 오름 주변 목장이나 큰돌이미오름 등지에서 무더기로 보았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한반도 북쪽 산야에 자란다고 했고, 몽골에선 무더기로 확인한 적이 있다.

                                    *아래는 몽골에서 찍은 것으로 꽃빛이 좀 달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