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의 시들(1)

김창집 2021. 10. 1. 00:11

 

아이를 낳아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다 헐은 자궁으로

 

수국이나 박태기나무

 

여치나 개똥지빠귀 같은

 

살려내는 우주를

 

낳고 싶습니다

 

고매古梅에 취하다

 

밭뙈기 팔아 들여온 쌀가마에서

고방 항아리로 쌀알들 쏟아지는 소리

햇살이 몽글다

어깨가 좁았던 사람

착해서 가난해진 그 사람의 몸에서 나던 살냄새

바람이 여물 먹은 소처럼 순해진다

몸이 검다는 것은 울음이 많이 쌓였다는 것

청산초 잎이 어린 쥐의 귀처럼

쫑긋하다

탈출구 없는 향기의 감옥

멀리 왔다 했으나

여전히 묶였다

온갖 소리 다 스민

저 아래에서

도대체 뿌리는

얼마나 많은 귀일까

 

비가 오신다

 

서울이나 광주에서는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비가 온다는 말은

장흥이나 강진 그도 아니면

구강포쯤 가야 이해가 된다

내리는 비야 내리는 비이지만 비가

걸어서 오거나 달려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어떨 때 비는 싸우러 오는 병사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그 병사의 아내가

지아비를 전쟁터로 보내고 돌아서서

골목길을 걸어오는

그 터벅거림으로 온다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새색시 기다리는 신랑처럼

풀 나무 입술이 보타 있을 때

산모롱이에 얼비치는 진달래 치마로

멀미나는 꽃내를

몰고 오시기도 하는 것이다

 

애월에서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열이 오르다

 

개나리꽃이 병아리 부리 같다는 것은

새삼스런 생각이 아니다

보이는 꽃마다 새 부리가 박혔다

 

참새 부리 같은 별꽃 딱따구리 부리 같은

산자고 오리 부리 같은 목련

 

꽃이 부리는 한사코 제 몸을 향해 있다

 

뒤란에 매화향 가득하다

 

참 많이 앓았겠다

 

낯익은 빗방울

 

처음 밥 짓기 시작 했던 건 여덟 살 때

어머니 논일 가시면 가마솥에 밥 안치고

가래나무로 불을 때면 싸게 인 불이 화르릉 타오르고

넘는 불 부지깽이로 다독이다 보면

솥뚜껑 아래로 주르륵 흐르던 눈물

색도 희멀건 그 밥물을 왜 눈물이라 했을까

살면서 날마다 오장육부 채우는 게

눈물 강 지나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밥 잘 짓는 솜씨는 녹슬 틈이 없고

혼자 먹는 밥은 서럽다는데 그거야 이력이 덜 붙은 탓

귀한 목숨 하나 위해 밥하고 반찬 만드는 것이

내 안에서 나를 낫게 하고 아프게 하시는

백조* , 아니 백조 분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잘 살자, 잘들 사시라, 나여

밥통에 오래 있어 꼬들꼬들해진 밥 있으면 끓여먹곤 하는 거

내 입으로 오신 그 씨앗들 고맙고 눈물 나서

우리들 언제 함께 파도로 출렁이면서

윗물 아랫물 뒤섞이기도 하면서 다순 손 맞잡으며

백조 명의 만찬을 생각해 보면

하늘에선

반가워! 반가워! 손 흔들며

활짝 활짝 낯익은 빗방울도 몇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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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우리 몸속 미생물의 수를 100조 개 정도로 추정한다.

 

 

                                       *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 2010)에서

                                           * 사진 : 솔체꽃과 솔체꽃에 심취한 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