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류시화 엮음 '잠언시집'의 시(8)

김창집 2021. 10. 11. 00:13

죽기 전에 꼭 해볼 일들 데인 셔우드

 

혼자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

누군가에게 살아 있을 이유를 준다.

악어 입을 두 손으로 벌려 본다.

2인용 자전거를 탄다.

인도 갠지스 강에서 목욕한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누군가의 발을 씻어 준다.

달빛 비치는 들판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는다.

소가 송아지를 낳는 장면을 구경한다.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보낸다.

특별한 이유 없이 한 사람에게 열 장의 엽서를 보낸다.

다른 사람이 이기게 해준다.

아무 날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친구에게 꽃을 보낸다.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른다.

 

나는 내가 아니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나는 내가 아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내 곁에서 걷고 있는자,

이따금 내가 만나지만

대부분은 잊고 지내는 자,

내가 말할 때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는 자,

내가 미워할 때 용서하는 자,

가끔은 내가 없는 곳으로 산책을 하는 자,

내가 죽었을 때 내 곁에 서 있는 자,

그 자가 바로 나이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라틴 아메리카 시인.

 

내 무덤 앞에서 - 미상

 

내 무덤 앞에서 눈물짓지 말라.

난 그곳에 없다.

난 잠들지 않는다.

난 수천 개의 바람이다.

난 눈 위에서 반짝이는 보석이다.

난 잘 익은 이삭들 위에서 빛나는 햇빛이다.

난 가을에 내리는 비다.

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 눈을 떴을 때

난 원을 그리며 솟구치는

새들의 가벼운 비상이다.

난 밤에 빛나는 별들이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라.

난 거기에 없다.

난 잠들지 않는다.

 

빈 배 장자(번역 : 토마스 머튼)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딕 시니어

 

그 남자는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그는 형편없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가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는 남에게 친절 따위를 베풀 시간이 없다.

 

그 여자는 뚱뚱하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이 왜 이런 불행을 타고 났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효과적인 다이어트 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세상은 그녀에게 재미없는 곳이다.

 

또 다른 남자가 있다. 그는 인정받고 싶고

명성을 얻고 싶다.

따라서 지금은 한가로이 웃고 지낼 시간이 없다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그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성에서 살 것이다.

 

또 다른 여자가 있다. 그녀는 못생겼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애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때가 되면 그녀는 턱 뼈를 깎고 코 수술을 할 것이다.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그녀 혼자 있게 내 버려두라.

 

그리고 또 다른 여자는 집안일 때문에 시간이 없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면

그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살 것이다.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집안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미루면서

 

이들 모두가 어떤 계기를 만났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들의 영혼도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오래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죽었으니까.

 

 

                     * 류시화 엮음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열림원, 2007)

                                                          * 사진 : 마이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