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소離巢
해 뜨기 한참 전
매화나무에서 어밀 찾는 아기새
찌찌찌찌, 찌• 찟• 찌• 찟
안쓰러운 울음소리가 노랗다
지켜보고 있는 곤줄박이 어미새
찌리찌릭 찌리찍찍 애가 탄다
아가야 무서워 말고
어서 허공으로 뛰어내리거라
그곳이 네가 갈 길이란다
아무리 어미새가 목이 메어도
아기새는 바깥이 마냥 두렵다
뛰어내려 어서
세상이란 허공이란다
네 길이 거기 있단다 아가야,
♧ 풍경
얼굴이 맷돌처럼 얽은 사내
모처럼 기어든 작부집
하룻밤 허기를 채우고 난 다음 날
복사꽃 핀 흐뭇한 얼굴로,
해가 중천에 오른 시각
호기롭게 여자를 끌고 들어간 음식점
계집이 시킨 것은 갈비탕 보통
사내가 주문한 것은 곰탕 보통,
종업원 주방을 향해
“여기 갈보 하나, 곰보 하나 있어요!”
♧ 흖다
돌을 찾아 강으로 가든
난을 캐러 산으로 가든,
멋진 돌을 만나는 사람은
앞서 가는 발 빠른 이가 아니고,
귀한 난을 찾는 이는
맨 뒤에 가는 느린 발걸음이다.
앞에 간다고 뽑낼 것도 없고
뒤에 간다고 서운 할 것 없다.
♧ 백지수표
백지수표는
구겨진 휴지만도 못하다
숫자를 적어 넣으면
화룡점정畵龍點睛일까
용이 꿈틀하는 순간
세상은 한 장 휴지가 되어
바람에 굴러간다
무거운 춘몽春夢 속으로.
♧ 백로白露
백로白鷺가 풀잎마다 알을 낳았다
반짝 햇살에 알도 반짝!
알 속에 하늘과 바다가 하나다
너무 맑아
그리움이나 사랑 그런 게 없다
은은한 인생!
♧ 수유역 8번 출구
바람 부는 날
나 역에 나가 그대를 맞으리라.
수유역 8번 출구
그대를 처음 만난 곳.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 나오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네.
한 계절이 그렇게 흐르고
한 해가 저물고 있는데,
눈도 내리지 않고
바람만 부는 한낮.
나 그곳에 나가
무작정 기다리네.
바람은 그날처럼 불어오는데
그대는 오지를 않네.
바로 그 때,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홍해리 시집 『정곡론』 (도서출판 움, 2020)에서
* 사진 : 한라생태숲의 가을 - 차례로 까마귀베개, 마가목, 참회나무, 말오줌때, 꾸지뽕나무, 야광나무, 비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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