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에 대하여
그의 바람난 아비는 칠성골 유명한 양복쟁이였다
삼촌뻘 되는 배다른 형도 그랬다
단아들에 소박맞은 어미는
저고리동전 삯바느질을 했다
후줄근한 잠바에 허름한 면바지가 전부였다
명주 수의 입고 입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미시未時 하관이 되자 눈발이 날렸다
관을 내리고 흙을 덮으려는 순간
서울서 내려와 오일장五日葬 지키던
평론가 윤모 형,
이 자식 추우켜 야, 이거 입엉 가라
입었던 바바리 벗어 관을 덮는다
알몸으로 태어나
평생 변변한 옷 한 벌 갖추지 못 했으나
생일날 이승 떠나며 바바리 얻어 입은
제주 출신 영화감독 경률이
♧ 출구는 없다
지리한 장맛비 잠시 숨 고르는 사이
교실 창틈으로 포로롱 날아든 잠자리 한 마리
시험지 받아들고 미로를 헤매던 아이들
일제히 잠자리가 그리고 간 자리에 눈길을 준다
유리창 너머 파란 하늘로 쏜살같이 날갯짓하다
부딪히고 다시 부딪히고
활자와 도형이 종횡무진하는 길 위의 아이들
가도 가도 막다른 길 다시 가도 막다른 길
파닥거리는 잠자리와
가쁜 숨 몰아쉬는 아이들
영락없다, 똑 같다
♧ 버렝이깍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내 유년의 입에 달고 살았던 버렝이깍
이제서야 너를 찾는다
잘 사는 집 아이는 뽀뿌린 빤스를 입고
우리는 달랑달랑 조쟁이 내놓고
넉넉한 집 아이는 튜브를 타고
우리는 양은세숫대야를 잡고
보들랑보들랑 물장구치면 버렝이깍, 너는
비쩍 마른 강생이 같은 몸뚱이 물 위에 띄워
한 입 가득 물 먹여 가면서
세상살이 쓴맛 단맛 깨우쳐 주었다
탑동바당 먹돌이 송두리째 생매장되고
맑고 고운 선반물이 잿빛 하늘에 가려
시름시름 숨넘어가는 동안 버렝이깍, 너는
바다새 한 마리 품어 안지 못했구나
갯강구 똥깅이 한 마리 키워내지 못했구나
술 탐하는 벗들과 흥청거리며
날름날름 날고기 넘기는 동안 버렝이깍, 너는
포크레인 삽날에 사타구니가 으깨어졌구나
썩은 물고기만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구나
다시 찾은 버렝이깍
잠시 서성이다 미안하단 말도 못하고 돌아선다
칼바람이 불어온다
♧ 스키드 마크
십 년 가까이 지내다 보면
속마음도 닮는 것일까
앞만 보고 달려온 길
잠시 멈춰 돌아보라고
오른쪽 백미러가 떨어지더니만
이쯤에서 내리라며
더 가버리면 돌아올 수 없을 거라며
운전석 문고리 뚝 하고 떨어진다
삶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한쪽 타이어 펑크 나더니 오늘은
비보호 좌회전 방향으로 자꾸만 쏠린다
바른 길 저만치 두고 자꾸만 쏠린다
고장 난 마음을 눈치 챈 것일까
마주 오는 차선에서 힐끗힐끗 눈길을 준다
위험수위 앞에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브레이크를 밟으며 여기까지 왔던가
밟아도 밟아도 차는
마음 한가운데 스키드 마크를 그리며 간다
한 번 내려진 유리창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게 이다지도 버거울까
몇 번을 멈춰서다가 결국
손톱만큼의 틈을 남긴다
그 틈새에서 바람이 불고 꽃이 핀다
그리로 누군가 들어와
마음 가득 씨앗 뿌리고 간다
♧ 꽃과 나무
중학교 2학년 생활국어 시간
‘꽃’과 ‘나무’는 단일어이고
‘꽃나무’는 합성어라고 핏대 세우는데
아이들 아무 반응이 없다
죽비 치며 으름장 놓아 보지만
눈길은 이미 운동장에 가 있고
그래, 차라리 나가자
교정에 핀 꽃 이름도 모르고
운동장 에두른 나무들도 모르는데
단일어면 어떻고 합성어면 또 어떤가
단발머리 찰랑거리며
까르르까르르 웃어대는
너희들 모두가 한 다발 꽃인 것을
속이 비면 빈 대로
둥 굽으면 굽은 대로
서늘한 그늘 드리울 저마다의 나무들인 것을
♧ 시험 시간
시험지 접어 종이배 만드는 거야
답안지 카드에 볼펜심 끼워 돛을 세우고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바다로
배를 띄우는 거야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반장, 너는 선장을 하고
부반장, 너는 갑판장을 하는 거야
바람 좀 불면 어때?
파도 좀 사나우면 어때?
바람 같은 거
파도 같은 거
지우개로 지우면서 나가는 거야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노를 만들고
우리 모두 떠나는 거야
사인펜 없으면 어때?
맨주먹으로 노 저어 가는 거야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먼 바다로 떠나는 거야
율도국에도 가고
용궁에도 가보는 거야
로빈슨크로스가 되면 또 어때?
그냥 떠나보는 거야
*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 (애지, 2006)에서
* 사진 : 바닷가에서 보이는 것들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문신 시조집 '해동의 들녘'에서(2) (0) | 2021.10.15 |
---|---|
월간 '우리詩' 2021년 10월호의 시(2) (0) | 2021.10.14 |
홍해리 시집 '정곡론'의 시들(5) (0) | 2021.10.12 |
류시화 엮음 '잠언시집'의 시(8) (0) | 2021.10.11 |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의 시(2) (0) | 2021.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