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시집 '정곡론'의 시들(5)

김창집 2021. 10. 12. 10:00

이소離巢

 

해 뜨기 한참 전

매화나무에서 어밀 찾는 아기새

찌찌찌찌,

안쓰러운 울음소리가 노랗다

지켜보고 있는 곤줄박이 어미새

찌리찌릭 찌리찍찍 애가 탄다

아가야 무서워 말고

어서 허공으로 뛰어내리거라

그곳이 네가 갈 길이란다

아무리 어미새가 목이 메어도

아기새는 바깥이 마냥 두렵다

뛰어내려 어서

세상이란 허공이란다

네 길이 거기 있단다 아가야,

 

풍경

 

얼굴이 맷돌처럼 얽은 사내

모처럼 기어든 작부집

 

하룻밤 허기를 채우고 난 다음 날

복사꽃 핀 흐뭇한 얼굴로,

 

해가 중천에 오른 시각

호기롭게 여자를 끌고 들어간 음식점

 

계집이 시킨 것은 갈비탕 보통

사내가 주문한 것은 곰탕 보통,

 

종업원 주방을 향해

여기 갈보 하나, 곰보 하나 있어요!”

 

흖다

 

돌을 찾아 강으로 가든

난을 캐러 산으로 가든,

 

멋진 돌을 만나는 사람은

앞서 가는 발 빠른 이가 아니고,

 

귀한 난을 찾는 이는

맨 뒤에 가는 느린 발걸음이다.

 

앞에 간다고 뽑낼 것도 없고

뒤에 간다고 서운 할 것 없다.

 

백지수표

 

백지수표는

구겨진 휴지만도 못하다

 

숫자를 적어 넣으면

화룡점정畵龍點睛일까

 

용이 꿈틀하는 순간

세상은 한 장 휴지가 되어

 

바람에 굴러간다

무거운 춘몽春夢 속으로.

 

백로白露

 

백로白鷺가 풀잎마다 알을 낳았다

반짝 햇살에 알도 반짝!

 

알 속에 하늘과 바다가 하나다

 

너무 맑아

그리움이나 사랑 그런 게 없다

 

은은한 인생!

 

수유역 8번 출구

 

바람 부는 날

나 역에 나가 그대를 맞으리라.

 

수유역 8번 출구

그대를 처음 만난 곳.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 나오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네.

 

한 계절이 그렇게 흐르고

한 해가 저물고 있는데,

 

눈도 내리지 않고

바람만 부는 한낮.

 

나 그곳에 나가

무작정 기다리네.

 

바람은 그날처럼 불어오는데

그대는 오지를 않네.

 

바로 그 때,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홍해리 시집 정곡론(도서출판 움, 2020)에서

      * 사진 : 한라생태숲의 가을 - 차례로 까마귀베개, 마가목, 참회나무, 말오줌때, 꾸지뽕나무, 야광나무, 비목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