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중진담
강 선생, 당신 말이야, 당신, 그럼 못써,
모임에 코빼기라도 한번 비춰야지,
언놈이 낯짝도 모른 놈을, 꼴 아깝다 하겠어,
농장 하면 다 그런가, 당신만 농장을 해,
혼자 바쁜 줄 알지? 다들 바쁜 세상이라구!
모임은 제가 없어도 잘 되잖아요, 선생님
몇 십 만본 귤 묘목 생사가 제 손에 달렸어요
필요 일손 무한대의 경황없는 미룰 수도 없는
농장은 제가 없으면 마비됩니다, 선생님
♧ 어느 종착역
한 검사가 있었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소소한 사연에도 인정사정 아예 없어
명성을 떨쳤다던가 승승장구 했다던가
뭔 건에 연루되어 발겨진 그의 행적
보는 족족 아구처럼 덥석덥석 집어삼켜
통째로 쟁여 있었네 대장 가득 빼곡히
나도 젊어 한때 검사를 꿈꾼 적 있어
그 꿈의 종착역도 어쩌면 저쯤이었을까
귤 묘목 넘실대는 이 들녘, 분망이다, 자유다
♧ 읍참마속泣斬馬謖
농장 가면 늘 묵묵한 나무들 많아서 좋다
천천히 돌아본다 살피고 도 살핀다
색깔로 상태를 읽느니, 다듬고 북돋우는
애지중지 그 귤나무들 내 손으로 벨 때 있어
애원의 눈망울도… 일도양단一刀兩斷! 읍참마속
먼 심려 그 품종갱신品種更新*을 그들이 하마 알까
집에 오면 홀가분히 나무들 없어서 좋다
고비 고비 숨 가쁘던 그 날들이 문득 와서
“여보게, 이젠 좀 쉬면서 하게” 차 한 잔을 권하는
---
*베어내고, 우수 품종으로 교체하는 일
♧ 적토마*
필마, 갈퀴 날리며 내 반생을 달려왔지
어쩌면 좌충우돌 목장이랴 농장이랴
안개 속 그 전력질주 돌아 돌아 돌아든
문득 보니 아~ 너도 백발이 성성한데
여태 나는 너를 채찍질 하는구나
한 목숨 걸던 날부터 내 황야의 동반이여
갈 길 아직 먼데 해야 차마 기우느냐
무시로 아득도 한 이 허기를 어쩌겠니
적토마, 숨 고르거라, 갈 데까진 가보자
---
*나의 농사 차 세레스의 애칭
♧ 잔물결
사업도 다 기울어 참담한 시절일 때
마음이나 추스르려 단학수련 다녔었네
밤들면 일호광장수련원 유일한 외출이었네
허탈한 나날로도 아내는 주머니에
꼬깃꼬깃 만원 한 장을 꼭 챙겨주었네
즐비한 포장마차들 눈 딱 감고 스치던
얼마를 만지작거렸나 너덜너덜 만원 한 장
빨래할 때 펴들고서 울먹이던 아내 모습
무시로 잔물결 이는 그 시절... 그 생각
♧ 서귀포 서정
우연히 날아온 새 홀연히 날아간 새
방파제 난만히 쌓인 시간들을 추스르며
섬 하나 회억의 층계를 더디 밟고 출렁인다
낮술 혼자 붉힌 서귀포 항 골똘한 바다
가슴 젖은 생각들이 물오리로 떠올라서
오는 양 가는 양 없이 떠난 얼굴 또 띄우고
눈 감으면 밀려오는 애증의 잔물결을
배수의 진중에 부동자세로 불러 세워
허술한 날들의 행적을 준열히 캐묻는 바람
한 인연 휩싸인 파도 끝내 포말로 질 때
함박눈 사위지 못해 빈 하늘만 사무치던
서귀포, 역류로 이는 아~ 내 젊은 서귀포여
* 강문신 시조집 『해동解冬의 들녘』 (문학과 사람, 2021)에서
* 사진 : 서귀포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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