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의 시(3)

김창집 2021. 10. 16. 00:13

나무의 영혼

 

집을 새로 지으면서

나보다 더 오래 산 장두감 나무를 베어버렸다

너무 큰 나무는 사람의 기운을 뺏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 나무의 검은 구멍 속에 귀신이 산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여린 벌레들만 신의 모습으로 기어다녔던 구멍

나무가 사라질 때 대뜸 허공이 들어오려 했지만

나무가 있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삼년이 지나도록

나무가 서 있던 동쪽을 바라보면

허공 대신 어떤 따스한 기운이 옹송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옥수수 곁으로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

젖비린내가 난다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 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처럼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

옥수수에서 연한 살내만 떠올렸을 뿐

 

울컥울컥 돋는 설움이 도톨도톨 알맹이로 뭉쳐 굳어지도록

 

시간의 뿌리

 

   마루 끝을 햇살이 콕콕콕 쪼아댑니다 백 년이 넘어서인지 햇살의 부리가 닿는 곳은 둥글어져 있습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나서 흘린 것들을 걸레로 닦아 냅니다 벌어진 나무 사이로 들어간 밥알 몇 개가 빠져 나오지 않습니다 꼬챙이로 틈을 후비다보니 묵은 때들이 길게 빠져 나옵니다 검게 뻗은 시간의 뿌리입니다

 

   오래된 것은 지나온 세월만큼 얼굴이 검습니다 하찮은 것도 쉬이 흘리지 못하고 받아들인 덕분입니다 고목나무 뿌리가 저렇게 검은 것도 돌이 되어 가라앉는 누군가의 속울음에 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비 그친 사이

 

마른 더덕 같은 늙은 여자 하나 골목길을 바쁘게 지나갑니다

그녀의 몸 안이 궁금하다는 듯 명아주와 강아지풀이 키를 높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하얗고 갈옷 젖은 데는 먹색입니다

오래도록 땅의 문을 두드렸을 지팡이는 무릎 높이입니다

통통통 지팡이가 땅속 사정을 묻는 소리

안에서는 아직 기척이 없나봅니다

 

바닥을 밀쳐내는 여자의 발걸음이 비꽃보다 빠릅니다

 

비빔밥

 

   비빔밥엔 잡다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 싱건지나 묵은 김치도 좋고 숙주노물이나 콩노물도 좋다 나물이나 남새 노무새도 좋고 실가리나 씨래기 시락국 건덕지도 좋다 잘못 끓인 찌개 찌끄래기나 달걀을 넣어도 좋지만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고추장이다 더러 막걸리를 넣거나 된장국을 홍창하게 넣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취향일 뿐 그렇다고 국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엔 여러 가지 반찬과 참기름 고추장이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비빈 밥이 비빔밥이 되기 위해서는 풋것이 필요하다 손으로 버성버성 자른 배추잎이나 무잎 혹은 상추잎이 들어가야 비빔밥답게 된다 다 된 반찬이 아니라 밥과 어우러지며 익어갈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묵은 것 새것 눅은 것 언 것 삭은 것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재료만 늘여놓는다고 비빔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요령이 필요하다. 비빈다는 말은 으깬다는 것이 아니다 비빌 때에는 누르거나 짓이겨서는 안 된다 밥알의 형태가 으스러지지 않도록 살살 들어주듯이 달래야 한다 어느 하나 다치지 않게 슬슬 들어 올려 떠받들어야 한다

 

   손과 손을 맞대고 비비듯 입술과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그렇게

   몸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게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우려 이미 분리할 수 없게 그렇게

   그렇게 나는 너를 배고

   너는 내게 밴 상태라야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는 사람아 비빔밥을 먹을래?

   내가 너에게 들고 싶다

 

 

                                   *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 2010)에서

                                              * 사진 : 석류(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