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문신 시조집 '해동의 들녘'에서(2)

김창집 2021. 10. 15. 00:46

취중진담

 

강 선생, 당신 말이야, 당신, 그럼 못써,

모임에 코빼기라도 한번 비춰야지,

언놈이 낯짝도 모른 놈을, 꼴 아깝다 하겠어,

 

농장 하면 다 그런가, 당신만 농장을 해,

혼자 바쁜 줄 알지? 다들 바쁜 세상이라구!

모임은 제가 없어도 잘 되잖아요, 선생님

 

몇 십 만본 귤 묘목 생사가 제 손에 달렸어요

필요 일손 무한대의 경황없는 미룰 수도 없는

농장은 제가 없으면 마비됩니다, 선생님

 

어느 종착역

 

한 검사가 있었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소소한 사연에도 인정사정 아예 없어

명성을 떨쳤다던가 승승장구 했다던가

 

뭔 건에 연루되어 발겨진 그의 행적

보는 족족 아구처럼 덥석덥석 집어삼켜

통째로 쟁여 있었네 대장 가득 빼곡히

 

나도 젊어 한때 검사를 꿈꾼 적 있어

그 꿈의 종착역도 어쩌면 저쯤이었을까

귤 묘목 넘실대는 이 들녘, 분망이다, 자유다

 

읍참마속泣斬馬謖

 

농장 가면 늘 묵묵한 나무들 많아서 좋다

천천히 돌아본다 살피고 도 살핀다

색깔로 상태를 읽느니, 다듬고 북돋우는

 

애지중지 그 귤나무들 내 손으로 벨 때 있어

애원의 눈망울도일도양단一刀兩斷! 읍참마속

먼 심려 그 품종갱신品種更新*을 그들이 하마 알까

 

집에 오면 홀가분히 나무들 없어서 좋다

고비 고비 숨 가쁘던 그 날들이 문득 와서

여보게, 이젠 좀 쉬면서 하게차 한 잔을 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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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내고, 우수 품종으로 교체하는 일

 

적토마*

 

필마, 갈퀴 날리며 내 반생을 달려왔지

어쩌면 좌충우돌 목장이랴 농장이랴

안개 속 그 전력질주 돌아 돌아 돌아든

 

문득 보니 아~ 너도 백발이 성성한데

여태 나는 너를 채찍질 하는구나

한 목숨 걸던 날부터 내 황야의 동반이여

 

갈 길 아직 먼데 해야 차마 기우느냐

무시로 아득도 한 이 허기를 어쩌겠니

적토마, 숨 고르거라, 갈 데까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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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농사 차 세레스의 애칭

 

잔물결

 

사업도 다 기울어 참담한 시절일 때

마음이나 추스르려 단학수련 다녔었네

밤들면 일호광장수련원 유일한 외출이었네

 

허탈한 나날로도 아내는 주머니에

꼬깃꼬깃 만원 한 장을 꼭 챙겨주었네

즐비한 포장마차들 눈 딱 감고 스치던

 

얼마를 만지작거렸나 너덜너덜 만원 한 장

빨래할 때 펴들고서 울먹이던 아내 모습

무시로 잔물결 이는 그 시절... 그 생각

 

서귀포 서정

 

우연히 날아온 새 홀연히 날아간 새

방파제 난만히 쌓인 시간들을 추스르며

섬 하나 회억의 층계를 더디 밟고 출렁인다

 

낮술 혼자 붉힌 서귀포 항 골똘한 바다

가슴 젖은 생각들이 물오리로 떠올라서

오는 양 가는 양 없이 떠난 얼굴 또 띄우고

 

눈 감으면 밀려오는 애증의 잔물결을

배수의 진중에 부동자세로 불러 세워

허술한 날들의 행적을 준열히 캐묻는 바람

 

한 인연 휩싸인 파도 끝내 포말로 질 때

함박눈 사위지 못해 빈 하늘만 사무치던

서귀포, 역류로 이는 아~ 내 젊은 서귀포여

 

 

                                * 강문신 시조집 해동解冬의 들녘(문학과 사람, 2021)에서

                                                      * 사진 : 서귀포 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