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1년 11월호의 시(1)

김창집 2021. 11. 1. 08:01

산책길에서 조병기

 

쉼터에서 꼬맹이들 서넛이

소꿉놀이를 하며 놀고 있다

양지 바른 고샅

울타리 길옆이 아니어도

등나무 그늘 아래서

너랑 나랑은 신부 신랑

나는 아빠 너는 엄마

밥을 짓고 반찬 만들며 논다

토라지기도 하고

풀어지기도 하고

너는 할머니 나는 할아버지

산다는 건 그런 것인가 보다

 

계절에 쓰는 유서 김미외

 

매미가 두꺼운 폭염 꼭지를 물고

갈대의 뺨에 새긴 울음

 

징검다리에 앉아

노을 바라보는 땀방울의 찰랑거림

 

그네를 흔들며

부풀던 어둠의 시간에 앉아

쏟아낸 웃음

 

순간을 감싼 시간의

발걸음 발걸음들

 

그렇게 사라진 것들에게

 

사랑할 수 없는

단 한 순간을 남겨 다오

쓴 다

 

맨드라미 백수인

 

너를 바라보면 새벽이 보인다

 

볏 붉은 수탉이 홰를 치며 외치는

그 뜨거운 희망가

높은 음계의 목청이 살아 있다

 

동녘 빛 밝아오는 첫새벽

차가운 철길 가르고 지나가는 급행열차

그 힘찬 기적소리 뒤의 붉디붉은 적막이 살고 있다

 

가을 담쟁이 - 임승진

 

여름내

푸른 눈웃음 흘리다가

어느새 다가온 서늘한 바람이

푸석해진 뺨을 훑는다

 

여름이 좋았다.

뜨거움에 달떠서

마음껏 끌어안고 있을 때가 좋았다

 

가을이 저벅저벅 걸어와

불그죽죽하게 훑어 내리는

불장난의 자국들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손바닥이

피멍으로 물드는 것은

재촉하는 이별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해서인가

 

불같은 가슴 타버리고

앙상한 줄기만 남겨질 것을 알기에

몸서리치도록 매달리는 손끝이

피 흘리다 못해 오그라든다

 

안구건조증 오명헌

 

내 떠난 지 이태도 안 됐는데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없구나

 

어머니는 내게 KF94 마스크를 씌워 주셨다

안경에는 김이 서리고

어머니의 옥색치마가 희미하게

안경 너머로 다가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내 눈가는 늘 젖어 있었다

 

사내자식이라고 눈물 흘리지 말란 법 있다더냐

 

마스크로는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어머니는 내게

하일렌플러스 점안액을 한 아름 안겨 주셨다

 

이윽고 눈물은 차고 넘쳤다

눈물과 사내 사이에는 방정식이 없었다

 

울 엄니 박동남

 

우렁이를 새끼들이 다 파먹고

빈 껍질이 둥둥 떠내려간다

새끼들이 하는 말

울 엄니

가마 타고 시집간다

 

 

                                       * 월간 우리202111401호에서

                                       * 사진 : 한라생태숲의 가을(2021.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