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2)

김창집 2021. 11. 4. 01:08

카라반의 꿈 김대용

 

삶들과 멀어질수록 더욱 깊어지는 사하라의 뿌리

달궈진 모래 내린 아직도 중세의 황야에

채광되지 않는 보석들이 깔려 있다.

오아시스 시장 모퉁이 문맹인 시인들이

암송으로 전해 내려온 노래가 글 쓸 줄 모르는

우리들을 울린다.

오래고 긴 우리들의 시는 기억하는 자들의 것.

 

사하라에 살아남아 꿈 키우면 연상에 익숙해

별 보고 점치며 살아온 우리들은

천년 달궈진 모래알 녹아 흘러 보석이 된 잔에

새물을 따라 마셨다.”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략)

 

심장 없는 시인, 켓 띠 김수열

 

미얀마 항쟁이 백 일째로 접어들던 어느 날

그들은 머리를 겨누지만

혁명이 심장에 있다는 걸 모른다.’고 외친

올해 나이 마흔다섯 미얀마 시인 켓 띠는

미얀마 군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간 후

심장과 모든 장기가 적출당한 채

하루 만에 텅 빈 주검으로 버려졌다

 

켓 띠의 외침을 듣고

혁명이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 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아챈

그들은 닭 잡듯 개 잡듯 시인의 심장을 도려낸 것이다

(중략)

 

우리의 시에 심장이 없다면

그건 시가 아니다

우리의 노래에 심장이 없다면

그건 노래가 아니다

 

결코 혁명이 아니다

 

펭귄 돌 김순선

 

네 조상은 펭귄이 아니었나 보다

바다를 떠나

숲길에 돌이 된 것을 보니

 

늙은 나무에 기대어 서서

까치발로

누굴 기다리는지

기다리다 지쳐 돌이 되었는지

아랫도리를 돌로 감싼 채

어제도 오늘도

그 자리 그냥

그대로

 

부모 형제 다 고향에

두고

혈혈단신으로

 

죽도록 사무치게

그리운 이 있어

이제 저제 기다리다

돌이 되었나

 

개귀* 김승립

 

이상하다

누가 내 인생의 책장을 접어놓았던가

잠 못 드는 밤

밤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책도 읽히지 않아 건성으로 개귀 접어놓고

창 밖 빗소리에 멍 때리고 있는데

평소 기억에 없었던 상념들이

여기저기서 개귀 걸린 책장처럼 마구 펼쳐진다

무슨 사진첩에 고이 간직했던 스냅 사진같이

예쁜 장면도 아니고 괜시리 웃음 베어물며

, 옛날이여 콧노래 나오는 그런 추억은 아예 가당치 않고

온통 치욕과 회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비겁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만

저 어둠을 때리는 빗소리처럼 가슴 아프게 파고든다

아마도 지우고 싶어서 차라리 잊어버린 것들일 텐데

절대로 내가 개귀 접어놓지 않을 텐데

참말로 이상하다

무엇이 내 인생의 책장에 개귀 접어놓았을까

                 (하략)

 

---

*개귀 : 영어 도그지어(dog’s ear 기억하고 싶은 책장의 귀퉁이를 삼각형으로 접어놓은 것)를 필자의 임의로 순우리말로 바꾼 역어

 

김신숙

 

쿡 누군가 나를 찔렀다

세 개의 손가락 세 개의 손톱

우리는 그 숲을 세 손가락 숲이라 불렀네

사람들은 숲으로 숨었다

숨어서

새의 눈동자가 되었을 사람들

세계가 깜깜할수록 눈물은

그렁그렁 차오르고 왜 맑은가

금방이라도 머리를 내려놓을

각오들

총구처럼 졸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뜬 눈으로

세계를 망보는 눈동자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란 수평선과 생장점

하늘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더 환히 물들었다

쏟아진

핏방울들이 뿌리에 닿아도

눈도 귀도 코도 혀가 잘려도

쿠루쿠루쿡 세계를 찍는

부리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

세계 너머에는 정의라는 벌레가 있지

촉감으로만 자라는 숲을 닮은 벌레 말이야

수평선 지나 그곳에 닿으면

우리는 어떤 발톱으로 내려앉을까

생장이

멈추면 나뭇잎 떨어지지만

벌레 기어간 자리가 간지러워

우리들 낮이고 밤이고 일렁거렸다

심장을 움켜쥐고 오늘은 울지만

숲 밖으로 수평선 밖으로

세 손가락을 활엽수처럼 펼치고

바닥은

세계 너머까지 쿡 치솟았다

 

매미 김영미

 

땅 위, 새하얗게 널린 불볕의 지루함

볼 수 없는 길 끝에 서 있는 그대

노래가 되지 않은 성긴 울음

약속하지 않은 약속

 

몇몇 해 긴긴 날을 그대 부르지만

그대는 귀가 없어 나의 노래를 듣지 못하니

내가 그대에게로 간다

 

가장 큰 나무 높은 가지에 올라

행여 그대 들을 수 있을까

정갈한 하늘빛 엮어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걸어두고

그대 발길마다 나무 그늘 한 조각씩 꿰매두었다

삼백예순날하고도 또 며칠이 될까

 

그대 오지 않는 날마다 낡아지고 닳아버리는 날

하이얗게 성근 베옷 틈으로 스며드는 소슬바람

허름한 날들을 이으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대 향한 내 바람이 헛되다고

어찌 북풍만을 탓할 수 있을까

 

긴 여름이, 지난했던 긴 여름이

 

 

                                      * 계간 '제주작가' 2021년 가을호(통권 74)에서

                                                  * 사진 : 청미래덩굴(멩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