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병택 시집 '벌목장에서'의 시(3)

김창집 2021. 11. 5. 00:35

어떤 저명인사

 

어떤 저명한 인사가

험한 세상을 혼자만 겪어본 듯

인생을 가르치고 다닌다

 

언제나 내세우는 것은

이백여 년 전에 통용되던

누런 색깔의 철학이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철학을 전파하는 일에 열중하고

바르게 사는 삶을 강조하지만

 

정작 바르게 사는 사람에겐

정말 어이없는 말들이다

 

말의 감동은 체험적 목소리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임을

저명인사인 그는 전혀 모른다

 

옛날의 들판에서

 

들판의 잡초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예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이다

유년시절에 자주 그러했던 것처럼

조그만 돌멩이를 집어 던져 본다

마음이야 더 멀리 던지고 싶지만

그것은 달리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돌멩이는 곧 포물선으로 떨어지고

비낀 내 오른팔은 공중에서 멈춘다

위로 올라가지 않는 오른팔을 보며

들판에 온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한다

 

그대의 침묵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화

 

그대에게 오로지

남긴 것은 침묵이었다

아득한 히아신스 향기가

천천히 지나갈 때도

세속의 잡다한 시선들이

빠르게 지나갈 때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그대

그저 를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다가오지도 않았다

흐르고 싶은 것이

사랑이라면, ‘는 더욱더

그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해어질 때*

눈물의 양이 순간마다 달랐다

화면에는 깊게 오열하는

그대의 침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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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때 : 셀린 시아마(프랑스)가 감독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화의 마지막 장면.

 

말 많은 사람

 

  태초에 있었던 말씀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이하는 그는 오래전부터 말이 많다 말 없는 사람은 없는 말로 살고, 말 많은 사람은 많은 말로 산다 말 없는 사람에게는 기억해야 할 말이 없지만, 말 많은 사람에게는 기억해야 할 말들이 많다 말 많은 그는, 지금도 쏟아낸 말을 주워 담지 못해 힘든 나날을 보낸다

 

  말 많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넓디넓은 허공을 부유하다가 마지막에는 그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해를 입고 있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돌아온 말들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을 때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지금도 많은 말로 많은 집을 짓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운명이다

 

주소 확인

 

잉크 냄새가 아직도 머물고 있는

전화번호부를 펼쳐 나를 찾는다

 

웬걸, 동시에 다섯 개의 이름이

내 앞으로 다가와 줄을 선다

 

거주하는 곳들은 다 다르지만

이름의 겉을 감싼 색깔과

크기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옛날에나, 지금에나 내게는

타인의 삶을 무조건 가슴에

담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이름들은 그에 아랑곳없이

그 동안의 고통과 기쁨을

제각각으로 풀어놓는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나와

다른 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새로운 발견

 

멀리 떨어져 있는 오늘을

 

내 앞으로 천천히 끌어당겨

 

잠깐 시선을 돌린다

 

성채는 오래전에 무너졌고

 

일상은 하천으로 흐르지만

 

저쪽, 울타리 밖 동산에서는

 

하늘을 보며 자란 나무들이

 

숨 쉬듯 가지를 흔들고 있다

 

 

                                           *김병택 시집 벌목장에서(새미, 2021)에서

                                                         *사진 : 가을 낮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