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의 시(6)

김창집 2021. 11. 7. 00:17

한라 수목원에서

 

1

알겠습니다, 내 그리움이 너무 우거졌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그리움을 방치해두고서는

그대 발 디딜 곳이 없다는 것을

그리움도 솎아내지 않으면 그대 맨살 다치게 하는

땅가시나 키우게 된다는 것을

 

2

담팔수 잎은 하루에 하나씩 진다고 합니다

우리 사이 이별은 그러했으면

하루 한 잎씩 지면서 무성해졌으면……

오래 전의 생각입니다

 

다만 한 잎이 떨어졌을 뿐인데 나무가 출렁거립니다

바람 때문에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라고

했던 생각을 지웁니다

 

3

송두리째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를 봅니다

나이테마다 맺힌, 투명한, 그 방울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먼 데 보는 눈동자에 맺힌, 그 짠물

 

서랍에 담긴 먹처럼 가만 나는 놓여 있습니다

 

윗세오름 가는 길

 

산정으로 가는 길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산이 너무 아파 막아두었을 뿐입니다

헤어지자는 그대의 말을 듣고

윗세오름으로 갑니다

 

바다로부터 먼 곳으로 왔는데

등성이에 오르니 바다가 금방 엎질러질 듯

가까이 있습니다 소리 없는 파도는

거세어집니다 아무리 파도가 높아도

수평선은 미동이 없습니다

 

잎 떨어진 나무의 가지 틈틈이

하늘이 보입니다

시로미 잎마다 맺힌 비이슬

그 이슬 내 눈에 들어

열기를 식힙니다

 

까칠한 수풀 너머에서

까마귀 한 마리 날아오릅니다

 

하늘이 하도나 맑습니다

 

참 많이 우셨나 봅니다

 

오르드르

 

당신은 갯메꽃 사이에 앉아 있구려

갯메꽃 속에서 갯메꽃 꽃잎 같이 웃고 있구려

갯메꽃 되어 파도 소리

쌀 이는 소리 같은 파도 소리에 귀를

흘리고 있구려 오르드르

파도로 파도를 벗는 소리

몸이 몸을 지우는 소리 오르드르

그럴 때면 당신의 몸은 한없이 투명해져서

물비늘 되어 흘러갈 것 같구려

당신은 갯메꽃 그늘 같은 영혼을

갯메꽃 향기 같은 숨결을

갯메꽃 이파리 같은 갯메꽃

줄기 같은 세월을 가지고 있구려

오르드르 오르드르

그 시간에 몸을 묻으면

잔모래처럼 마음이 서걱거려서

나도 그만 아플 것 같구려

당신은 갯메꽃 되어 앉아 있구려

 

사계리 발자국 화석

 

다녀가셨군요 당신

당신이 오지 않는다고 달만 보며 지낸 밤이 얼마였는데

당신이 다녀간 흔적이 이렇게 선명히 남아있다니요

물방울이 바위에 닿듯 당신은 투명한 마음 발자국을 남기었으니

그 발자국 몇 번이나 찍혔기에 화석이 되었을까요

 

아파서 말을 잃은, ……당신

눈이 멀도록 그저 바라다보기만 하였을 당신

다녀갈 때마다 당신은 또 얼마나 울었을까요

몹쓸 바람 모슬포 바람에 당신 귀는 또 얼마나 쇠었을까요

사랑이 깊어지면 말을 잃는 법이라고

마음 벼랑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를 데려와

당신의 발자국 위에 세워봅니다

 

소금 간 들어 썩지 않을 그리움, 입 잃고 눈 먼 사랑 하나

당신이 남긴 발자국에 새겨봅니다

다녀가셨군요…… 당신

 

남천

 

가지 못했다

그대와 남천(南天)에 살고자 했으나

가지 못했다 남천에

창밖은 남천

햇살이 찹쌀가루 같은 날

나무들 잎 끝은 순해지고

호흡은 가지런해진다

남천에 남천에 흰 꽃이 피고

초록의 잎들이 햇살로 몸을 씻는다

밀려오는 파도의 결이 음표가 되어 떠도는

남천에서는 음악으로 숨을 쉬고

바람의 몸을 가진 자들이 있다

남천의 길은

초록 잎이나 꽃으로 가는 길

물이 되거나 향기가 되거나

물의 몸이거나 향기의 몸이거나

그렇게는 갈 수 있을 거라 하였다 남천에

바람의 모태인 그곳에 가야

그대를 꽃 피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가고자 하였으나

가지 못했다 창밖은 남천

바람은 그대의 살내를 옮아오고

옴살을 앓아 나 아직 푸르건만

가지 못할 남천

 

몸을 다 울어 하늘빛이 될 때까지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