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라 수목원에서
1
알겠습니다, 내 그리움이 너무 우거졌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그리움을 방치해두고서는
그대 발 디딜 곳이 없다는 것을
그리움도 솎아내지 않으면 그대 맨살 다치게 하는
땅가시나 키우게 된다는 것을
2
담팔수 잎은 하루에 하나씩 진다고 합니다
우리 사이 이별은 그러했으면
하루 한 잎씩 지면서 무성해졌으면……
오래 전의 생각입니다
다만 한 잎이 떨어졌을 뿐인데 나무가 출렁거립니다
바람 때문에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라고
했던 생각을 지웁니다
3
송두리째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를 봅니다
나이테마다 맺힌, 투명한, 그 방울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먼 데 보는 눈동자에 맺힌, 그 짠물
서랍에 담긴 먹처럼 가만 나는 놓여 있습니다
♧ 윗세오름 가는 길
산정으로 가는 길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산이 너무 아파 막아두었을 뿐입니다
헤어지자는 그대의 말을 듣고
윗세오름으로 갑니다
바다로부터 먼 곳으로 왔는데
등성이에 오르니 바다가 금방 엎질러질 듯
가까이 있습니다 소리 없는 파도는
거세어집니다 아무리 파도가 높아도
수평선은 미동이 없습니다
잎 떨어진 나무의 가지 틈틈이
하늘이 보입니다
시로미 잎마다 맺힌 비이슬
그 이슬 내 눈에 들어
열기를 식힙니다
까칠한 수풀 너머에서
까마귀 한 마리 날아오릅니다
하늘이 하도나 맑습니다
참 많이 우셨나 봅니다
♧ 오르드르
당신은 갯메꽃 사이에 앉아 있구려
갯메꽃 속에서 갯메꽃 꽃잎 같이 웃고 있구려
갯메꽃 되어 파도 소리
쌀 이는 소리 같은 파도 소리에 귀를
흘리고 있구려 오르드르
파도로 파도를 벗는 소리
몸이 몸을 지우는 소리 오르드르
그럴 때면 당신의 몸은 한없이 투명해져서
물비늘 되어 흘러갈 것 같구려
당신은 갯메꽃 그늘 같은 영혼을
갯메꽃 향기 같은 숨결을
갯메꽃 이파리 같은 갯메꽃
줄기 같은 세월을 가지고 있구려
오르드르 오르드르
그 시간에 몸을 묻으면
잔모래처럼 마음이 서걱거려서
나도 그만 아플 것 같구려
당신은 갯메꽃 되어 앉아 있구려
♧ 사계리 발자국 화석
다녀가셨군요 당신
당신이 오지 않는다고 달만 보며 지낸 밤이 얼마였는데
당신이 다녀간 흔적이 이렇게 선명히 남아있다니요
물방울이 바위에 닿듯 당신은 투명한 마음 발자국을 남기었으니
그 발자국 몇 번이나 찍혔기에 화석이 되었을까요
아파서 말을 잃은, ……당신
눈이 멀도록 그저 바라다보기만 하였을 당신
다녀갈 때마다 당신은 또 얼마나 울었을까요
몹쓸 바람 모슬포 바람에 당신 귀는 또 얼마나 쇠었을까요
사랑이 깊어지면 말을 잃는 법이라고
마음 벼랑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를 데려와
당신의 발자국 위에 세워봅니다
소금 간 들어 썩지 않을 그리움, 입 잃고 눈 먼 사랑 하나
당신이 남긴 발자국에 새겨봅니다
다녀가셨군요…… 당신
♧ 남천
가지 못했다
그대와 남천(南天)에 살고자 했으나
가지 못했다 남천에
창밖은 남천
햇살이 찹쌀가루 같은 날
나무들 잎 끝은 순해지고
호흡은 가지런해진다
남천에 남천에 흰 꽃이 피고
초록의 잎들이 햇살로 몸을 씻는다
밀려오는 파도의 결이 음표가 되어 떠도는
남천에서는 음악으로 숨을 쉬고
바람의 몸을 가진 자들이 있다
남천의 길은
초록 잎이나 꽃으로 가는 길
물이 되거나 향기가 되거나
물의 몸이거나 향기의 몸이거나
그렇게는 갈 수 있을 거라 하였다 남천에
바람의 모태인 그곳에 가야
그대를 꽃 피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가고자 하였으나
가지 못했다 창밖은 남천
바람은 그대의 살내를 옮아오고
옴살을 앓아 나 아직 푸르건만
가지 못할 남천
몸을 다 울어 하늘빛이 될 때까지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 (창비,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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