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1년 11월호의 시(3)

김창집 2021. 11. 16. 00:02

비둘기 손님 이기헌

 

식당 문을 확 열어젖히고

소금을 한 주먹 냅다 뿌렸다

대낮부터 술꾼들이 들이닥쳐

한참을 진상짓하다 돌아간 뒤였다

 

오늘 장사는 글러 먹을 판이다

 

근처에 있던 비둘기 한 마리

저에게 먹이 주는 줄 알고

잽싸게 문 앞으로 날아왔다가는

멀똥멀똥 내 눈을 쳐다보는 거였다

 

안 됐다 싶어 주방으로 가서

한 움큼 먹이를 가져다 뿌려주었다

소금 길에 곡식알 뒤엉켜지고

온 동네 비둘기들이 몰려들었다

 

은근 저녁 손님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지나간 일 - 성숙옥

 

색 잃은 벚나무 낙엽

마음 구멍에 걸리는데

지나간 일들이 그 위에 쌓인다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터무니없는 마음에서 사무치는 바람

 

우리는 그때

쉼표도 없이 한쪽으로만 돌진했는가

 

변화무쌍한 마음에 기대다 잊은 얼굴과 잊힌 얼굴

함께 한 여러 일은 그것으로 완성된 것을

 

버스를 몇 번이나 지나쳐도 좋은 윤중로 벚꽃 길

 

공들여 걷던 눈 내린 남산 순환도로

 

다정도 무정도 지나갔지만

 

추억에 부딪히면 풍경소리처럼 떠오는 일이야

 

벚나무가 중얼거리는 저녁 무렵에

 

얼굴 박광영

 

상사화 구근을 심었다

 

뾰족뾰족 올라올 꽃을 기대했다

 

고추 끝물이 지나도록 맥문동 잎만 퍼렇다

 

올핸 유독 비가 많았다

 

반전 - 김혜천

 

무너져 내린 잔해를 덮으며

하루를 내리고 또 하루를 내리는 폭설

 

길 잃은 개 한 마리 목청껏 우는 밤

그 목소리를 따라 칠흑을 헤매었다

섣부른 연민은 만용이라는 걸 아는데

시간은 그리 오래 버텨주지 않았다

짐승은 쓰레기를 뒤져서라도

고픈 배를 채우면 그뿐

울부짖던 밤은 이미 어제의 일

살얼음 위에 쌓인 눈이

평온이라는 이름표를 달 듯

곳곳에 도사린 배반의 위험 요소

허우적댈수록 빠져드는 늪

네발로 기던 비루먹은 날들

 

그러나, 그 엄혹한 길 위에 찍은

깊고 높은 우두자국마다

푸른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

 

주왕골 단풍 - 이수미

 

난 노랗고 빨갛게 익은

 

그대에게

 

은은히 흠뻑 젖어 녹아 버렸는데

 

그대는 무엇에 달아올라

 

바알간 얼굴하고 계십니까그려

 

단팥빵 - 이인평

 

명자는 빵을 좋아해

빵만 보면 기쁨이 빵처럼 부풀어 오르지

 

단팥이 꽉 찬 세상을

명자는 살지

단팥빵 같은 세상을 조금씩 맛보면서 살지

 

사람들이 단팥빵으로 보일 때도 있지

날마다 용케도 살아 있는

빵들

배가 빵처럼 볼록한 군상들이

빵처럼 쌓여 있는 풍경을 보면서

명자는 입맛을 다시지

 

날마다 먹어도 먹어도 끊임없이 쌓이는

명자의 단팥빵을 사 들고

명자를 찾아가는 단팥빵들이

때론 명자를 빵으로 만들어버리지

 

그래도 명자는 빵을 좋아해

빵만 보면 가슴이 빵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빵 같은 세상을 뜯어먹으면서

삶이 빵빵해지면

빵처럼 슬슬 구워지면서 명자는 살지

 

 

                                        * 월간 우리202111401호에서

                                                 * 사진 : 영남 알프스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