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 발간

김창집 2021. 11. 15. 15:36

            ♧ 시인의 말

 

 

             아프다 소리 한 번 못한 채

             생은 아직 초입인데,

 

             나 살자고

             얼떨결에 받아든 첫 문장이

             하필 당신,

 

             한 꺼풀씩 전생을 돌려 깎은 지환指環이었다.

 

                                                       2021년 여름

                                                              고영숙

 

나를 낳아주세요

 

  오늘도 엄마를 뽑고 있어

 

  구석에 기대 쉬는 엄마는 뽑기가 쉬워 오늘은 팔뚝이 굵은 엄마를 뽑고 내일은 다크서클을 드리운 엄마를 뽑을 거야 눈썹 문신을 한 엄마도 있어 세상엔 거짓말처럼 웃고 있는 엄마들이 수없이 많아 엄마는 팔딱이는 소문들로 요리를 하지 가끔 지루해진 소문을 한 번 더 끓이면 엄마 냄새가 나지 나는 길쭉하게 자라고 있어 날마다 내 생일이야 매일 나를 낳아줄 엄마가 필요해 갈색 골목에 레드카펫을 깔고 모든 저녁을 기다리는 엄마 떨리는 손목으로 꽃잎을 뿌리며 우아하게 걸어가고 있어 반값으로 할인된 엄마도 갓 인화한 증명사진을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엄마도 두근두근 증후군을 앓고 있어 일류도 지나고 나면 가볍고 간단히 오류가 되어 버리는 세상 어제는 건너편 마트에서 엄마를 세일하고 겨울 언덕바지에 떨어지는 음악은 항상 슬로모션으로 녹았다 얼기를 반복해 유통기한이 줄어들수록 손때 묻은 엄마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어

 

  내일 아침은 엄마가 또 나를 낳을 거야

 

원본대조필

 

이 책은 1942년 간행된 편년체 원본이다

쉰 적도 없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전 생애의 기록이고 삶의 보고서다

수많은 배경 중 뼈대 있는 정본을 세우고

종종 바람을 타고 다니던 호시절은

용을 써도 먹히지 않아 생략한다

구겨진 쪽의 빗금 간 시간이 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저항 없는 덮어쓰기로

찢길 일만 남은 목차가 먼지를 쓸어내린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우는 낯선 필체

위태로운 행간마다 둥둥 떠다닌다

바람은 곳곳마다 무수한 구멍을 내고

낡은 문장들에서 물큰한 울음소리가 묻어나온다

역주행에 쓸려간 물살의 흔적

기진한 몸뚱어리가 사본의 발끝으로 점점 지워진다

서늘한 등짝, 목구멍에 밀려드는 어둠처럼

흩어진 슬하의 이름들이 하나하나 지문처럼 찍히는 밤

페이지를 넘길수록 몸피가 줄어든다

풀이 죽은 문장들, 맨 끝줄 가까스로 매달리거나

긴 묵독 끝 더듬더듬 통증의 출처를 필사한다

안간힘으로 버티는 낡은 종이

아직 폐기되지 않아 원본대조필 효력이 유효한

아버지

 

인공눈물

 

, 내 안에서 시작하는 물살이라면

나비처럼 맨발로 모래언덕으로 걸어간다면

울컥할 때마다 조금씩 포개어보는 한날한시

뛰어내려 허공에서 어긋난다면

바람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비껴간다면

한때 어슬렁거리던 밀물과 썰물처럼

눈 밖의 물비늘들이 나뒹구는 투명한 무덤

소용돌이치는 눈빛이 눈시울을 건너는 중이라면

솟구치는 것, 곤두박질치는 것, 뭉개어지는 이목구비는

혀끝에 매달린 말들

뚝 뚝 떨어지는 기척,

퇴화하기 전 눈물 한 방울이 사구에 닿는 거리

한 치 앞에 엇갈린 수평선을 걸어 두고

글썽거리는 짐승 한 마리 물살을 견디는 중이라면

일정한 방향으로 출렁거리는 속설이

멀리 벗어나지 못한 물의 발목을 잡는다면

끌어당겼다 살짝 떨어뜨린다

능숙하게 티끌을 훑어 내리는 흔적이라면

수만 갈래로 휘청거리는 해일이라면

마지막 분리해서 버리는

일회용 파도가 섬을 만든다면

눈물은 절벽을 흐르고 떨어져 내려

나비처럼 사뿐히 날아 눈가에 맺히는

둥둥둥 떠가는 인공섬이라면

인공의 눈물이라면

 

겨를

 

시간을 기록하는 톱니바퀴

 

비탈길을 올라온 발바닥이 조심조심 오늘의 패를 뗀다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을까

 

검은 나뭇잎을 뒤집으면 낯선 이름으로 새겨지는 풍속風速

 

창끝에 깊게 찔릴수록 보이지 않는 배후

 

낯선 도형의 냄새가 난다

 

밤의 잎들이 흘리는 검은 눈물이 아득한 극점을 돌고 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어둠

 

숨죽이고 사라지는 미래

 

빛나는 술잔을 들고 가장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슬픔

 

오늘 하루 신의 운명을 가로질러 온 검은 형상

 

내가 믿는 건 길게 드리운 창끝

 

당신은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 안의 섬광

 

톱니와 톱니 사이에서 잠깐 머무는 겨를

 

 

                             *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리토피아, 2021)에서

                                                   * 사진 : 심해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