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경훈 시집 '수선화 밭에서'의 시(3)

김창집 2021. 11. 17. 01:07

산과 바다가

 

짐짓, 뒷걸음 멀리 나앉은 제주바다가

신기루처럼 섬들을

수평선 포말절벽 끝자락에 올리자

 

딴청, 외로이 하늘 보던 한라산

오름들 손잡고 성큼 다가가

진초록 외투 벗고 눈빛 나누네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는

상처받은 연인들처럼

 

바람마저 숨죽인 벌건 대낮에

, ,

산과 바다가

 

아무도 없었다

    -진도 팽목항에서

 

거기, 방파제 중간쯤

주인 잃은 신발들만

걸음을 멈추고

살아 있는 이

아무도 없었다

눈앞에서 뻔히

모든 걸 삼킨 바다에도

이어중간 구름길 바람길에도

피울음 삼킨

먹먹히 에인 가슴들만

빈 하늘에 나부끼고

거기, 살아 있는 것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눈감고 뻔뻔히

조난된 구조

해체된 정부만

비닐쓰레기로 날리고 있었다

 

춘분春分

 

경칩 지나 민달팽이 하나 기웃 들더니

오늘 노린재 한 마리 날아드네

겨울 견딘 모기는 온기 찾아 다가오고

거미는 천정 구석 본디 제 집 찾으니

 

저마다 자유로이 벗하여 다가오건만

혼자 마음 없이 비켜 앉아서

어찌 남 탓 하는가

 

밤하늘 흰구름 사이 바람달빛 가득한데

내일은 또 어떤 이 오려나

 

방안 가득 창을 열어 봄을 맞을 일이다

 

포구浦口에서

 

넘쳐나는 파도의 위협을 보고서야

생명을 짐작하는

나는 저 바닷속 물고기 화석이었는지 몰라

 

수평선이 숙명이 아니라고 말하는

너의 그 엷은 웃음이 눈물이라는 걸

 

바다가 뭍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또한 땅과 함께 멀리 나가기 위해서라는 걸

 

어쩌자고 이제서야 겨우 깨달았는지

독을 잃어버린 복어처럼 서서히

희석된 연후에나 후회하는 것인지도 몰라

 

귤향橘香

 

제주의 5월은

가는 곳마다

귤향 아득하다

바람결인 듯

꿈결인 듯

아찔한 평화다

도시의 악취는

참향에 밀려

잠시 기억상실이다

5월 제주는

봄향 아늑히

지깍이다

4월 한라산엔

눈발 날리는데

 

한라병원 5병동 502

 

  모든 사람에게는 꼭 그만큼의 존재감이 있다 담당 의사보다는 내 키가 더 크고 환자인 조군보다는 몸무게가 덜 나간다 진실의 무게는 중량이 아니다 마음의 크기는 도량형이 아니다 한라병원 5병동 502호의 8명의 환자들은 모두 자기만큼의 진실의 끈과 삶의 의욕을 온전히 붙잡고 있다 모두들 몸은 정박한 배처럼 닻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모두 날개를 달고 있다 불편한 서로에게 팔이 되어주고 다리가 되어주고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조금씩 서로의 병세를 감당하고 있다 그들 진정의 눈에는 병실이라는 소사회도 하나의 우주적 질서로 편안해진다 모두들 비 내리는 병실 밖을 바라보며 돛을 달아 날아오르는 상상을 한다 밖은 어둠인데 세상이 환하다

 

 

                                  *김경훈 시집 수선화 밭에서(도서출판 각, 2021)에서

                                             *사진 : 성산일출봉 소묘(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