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발간

김창집 2021. 11. 20. 01:15

시인의 말

 

 

밤새 뒤척이다가

 

오래 묵혀두었던 연서를 이제야 띄운다

 

이 또한 헛된 일일 수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어쩌면 이 또한 무책임한 죄일 수 있지만

 

만 리 밖 그대에게

 

젖은 노을 한 자락으로라도

 

이 먹먹한 심사가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닿았으면 한다

 

미안하다 그대여

 

용서하시라

 

 

 

          2021년 상달에

 

11

 

불타버린 산 하나 내려와

나를 깨우네

 

이미 헐거워진 가죽 껍데기

벗어놓고 그만 내려서라고

 

세상 덧없이 빛나던 잎, 잎들

식은 들판에 맨발로 눕고

 

어디선가는 우리 발 담가

삶을 희롱하던 계곡 물소리도

문득 끊어지네

 

바람은 한기를 데불고

사방팔방 미망을 두드리는데

 

생각건대, 저 한기에 몸 그냥 내주면

정신은 눈매 곱게 세우고

차운 물소리로 돌아오리라

 

벌레 한 마리의 시

 

들녘, 아직 추위 강파른데

어디선가 벌레 한 마리

움 열고 대가리를 내민다

칼바람조차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줌 온기의 작은 몸짓으로

꽝꽝 언 땅을 씩씩 밀어낸다

저 무모함!

오랜 잠에 묶여 있던 어린 풀씨들

한 마리 벌레의 대책 없는 꼼지락거림에

간지럼 타며 아아아 기지개 켠다

온 세상이 그만 봄빛으로 가득하다

, 그대에게 벌레 한 마리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지구를 온통 파랗게 뒤흔들어놓는

무모한, 썩지 않는 사랑을

 

열애

 

입추 무렵

비 한 줄기 겨우 지나간 후

폭염 아래 고추잠자리들이 나른하게 짝짓기 하고 있다

아니 그것들은 서로 격렬하게 탐닉하고 있다

폭염의 빨간 햇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보다 더 벌겋게 생을 구가하고 있지 않은가

세찬 빗발 아래서든 뜨거운 불볕 아래서든

나른하게격렬하게사이

그냥 서로에게 절실히 포개져

스스로를 벌겋게 태우는 삶도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먼 산에 단풍 들겠다

 

배경

 

당신은 늘 배경으로 앉아 있다

멀리서 물소리가 들린다

해가 설핏 기울고 나뭇가지들이

서쪽으로 몸 돌리는 시간

비로소 새들은 날개를 접고 보금자리를 튼다

 

그래도 당신은 배경으로 남아 있다

배경 속에는 간혹 흐리고 등 뒤로

비가 내리기도 한다

어떤 슬픔도 함께 젖는다

 

언젠가 당신의 무거운 그림자를 본 적이 있다

헐겁고 초라한 표정이었다

때로 그림자를 가만히 흔들면

수많은 새 떼들이 우르르 쏟아져

온 하늘을 수놓기도 했다

그 아아로운 비상이라니

 

이제 새들은 더 이상 둥지를 틀지 않지만

당신은 끝끝내 배경으로 남아 있다

배경 위로 낮은 바람이 불고 잠시

내려앉는 새들이 보인다

마른 들판에서조차

당신의 배경이 몰아오는 그리운 물소리

세상의 귀가 환하게 트인다

 

존재의 이유

 

가령, 네 눈물 같은 거

삶이 버거울 때, 입술 깨물다가

간신히 방울방울 맺히는

보석 같은 거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가령, 네 콧등의 뾰루지 같은 거

예고 없이 불현듯 돋아

귀찮게 삶을 간지럽히는

확증(確證) 같은 거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꽃은 외려 바람의 시샘으로 피어나는 법

언뜻 흐리다 개고

다시 흐려지는

네 마음의 풍경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뜨락에 비 듣고

꽃잎 파르르 떨릴 때

비로소 꽃잎으로 눈뜨는

네 순결한 성()의 깊이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삶창시선 63,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