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밤새 뒤척이다가
오래 묵혀두었던 연서를 이제야 띄운다
이 또한 헛된 일일 수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어쩌면 이 또한 무책임한 죄일 수 있지만
만 리 밖 그대에게
젖은 노을 한 자락으로라도
이 먹먹한 심사가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닿았으면 한다
미안하다 그대여
용서하시라
2021년 상달에
♧ 11월
불타버린 산 하나 내려와
나를 깨우네
이미 헐거워진 가죽 껍데기
벗어놓고 그만 내려서라고
세상 덧없이 빛나던 잎, 잎들
식은 들판에 맨발로 눕고
어디선가는 우리 발 담가
삶을 희롱하던 계곡 물소리도
문득 끊어지네
바람은 한기를 데불고
사방팔방 미망을 두드리는데
생각건대, 저 한기에 몸 그냥 내주면
정신은 눈매 곱게 세우고
차운 물소리로 돌아오리라
♧ 벌레 한 마리의 시
들녘, 아직 추위 강파른데
어디선가 벌레 한 마리
움 열고 대가리를 내민다
칼바람조차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줌 온기의 작은 몸짓으로
꽝꽝 언 땅을 씩씩 밀어낸다
저 무모함!
오랜 잠에 묶여 있던 어린 풀씨들
한 마리 벌레의 대책 없는 꼼지락거림에
간지럼 타며 아아아 기지개 켠다
온 세상이 그만 봄빛으로 가득하다
나, 그대에게 벌레 한 마리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지구를 온통 파랗게 뒤흔들어놓는
무모한, 썩지 않는 사랑을
♧ 열애
입추 무렵
비 한 줄기 겨우 지나간 후
폭염 아래 고추잠자리들이 나른하게 짝짓기 하고 있다
아니 그것들은 서로 격렬하게 탐닉하고 있다
폭염의 빨간 햇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보다 더 벌겋게 생을 구가하고 있지 않은가
세찬 빗발 아래서든 뜨거운 불볕 아래서든
‘나른하게’와 ‘격렬하게’ 사이
그냥 서로에게 절실히 포개져
스스로를 벌겋게 태우는 삶도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먼 산에 단풍 들겠다
♧ 배경
당신은 늘 배경으로 앉아 있다
멀리서 물소리가 들린다
해가 설핏 기울고 나뭇가지들이
서쪽으로 몸 돌리는 시간
비로소 새들은 날개를 접고 보금자리를 튼다
그래도 당신은 배경으로 남아 있다
배경 속에는 간혹 흐리고 등 뒤로
비가 내리기도 한다
어떤 슬픔도 함께 젖는다
언젠가 당신의 무거운 그림자를 본 적이 있다
헐겁고 초라한 표정이었다
때로 그림자를 가만히 흔들면
수많은 새 떼들이 우르르 쏟아져
온 하늘을 수놓기도 했다
그 아아로운 비상이라니
이제 새들은 더 이상 둥지를 틀지 않지만
당신은 끝끝내 배경으로 남아 있다
배경 위로 낮은 바람이 불고 잠시
내려앉는 새들이 보인다
마른 들판에서조차
당신의 배경이 몰아오는 그리운 물소리
세상의 귀가 환하게 트인다
♧ 존재의 이유
가령, 네 눈물 같은 거
삶이 버거울 때, 입술 깨물다가
간신히 방울방울 맺히는
보석 같은 거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가령, 네 콧등의 뾰루지 같은 거
예고 없이 불현듯 돋아
귀찮게 삶을 간지럽히는
확증(確證) 같은 거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꽃은 외려 바람의 시샘으로 피어나는 법
언뜻 흐리다 개고
다시 흐려지는
네 마음의 풍경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뜨락에 비 듣고
꽃잎 파르르 떨릴 때
비로소 꽃잎으로 눈뜨는
네 순결한 성(性)의 깊이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삶창시선 63, 2021)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의 시(2) (0) | 2021.11.22 |
---|---|
양동림, 시집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 발간 (0) | 2021.11.21 |
강문신 시조집 '해동의 들녘'에서(6) (0) | 2021.11.19 |
'애월문학' 2021년 제12호의 시 (0) | 2021.11.18 |
김경훈 시집 '수선화 밭에서'의 시(3) (0) | 2021.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