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自序
나의 시는
십여 년을 꽁꽁 뭉쳐둔 변비처럼
내장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돌이 되어가고 있다.
세상을 향해 표출하지 못하고
굳어가는 덩어리들
어느 해인가 차마
생명이 자라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어미의 자궁 속에서 굳게 만든
슬픈 씨앗이 이제
창자로 자리를 옮겨
모진 어미를 무심한 아비를 질타하고 있다.
나서기 두려운 세상을
노려보고 있다.
2021. 11. 19.
체온이 합쳐진 날을 기념하며
♧ 지우개 똥
남의 잘못 내 몸 바쳐
바로잡아줬더니
그는 정의가 되었고
나는
똥이 되었다
♧ 후진
길을 가다
막혔을 때 뒤돌아 간다는 것
얼마나 현명한가?
좁은 길에서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 물러서 주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배려인가!
♧ 맹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신경이 없는 나의 두 눈에선
집도 지을 수 없고 장사도 할 수 없다
얽히고설킨 신경 세포들이
하필 나의 두 눈에는 연결이 안 돼 있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아무런 행동을 안 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나의 두 눈은
눈동자가 없는 것보다는 나은 거라고
위안 삼는 맹지다
슬픔을 어기는 눈물의 통로다
♧ 살아남기 6
-오몽헤사 살아진다
오몽헤사 살아진다
아멩 몰멩진 사름이라도
오몽허당 보민
놈 못지 안허게 살아진다
산덴 허는 건
숨만 쉰다는 거 아니여
몸으로 말도 허곡
일로 절로 오몽헐 대
살아있덴 곧는 거여
보이지도 안허는 쇠줄로 묶어부러도
호끔썩 호끔썩
오몽허당 보민 풀리는 거여
오몽헤사 살아진다
경 안허문 몬딱 사라진다
♧ 아버지 1
-속슴허라
그렇게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며칠을 눈만 꿈벅꿈벅 하시다
속슴하셨다
속슴허라
사태 때 으싸으싸 허당 다 죽었어
4·19 때도 으싸으싸 하다 죽었어
속슴허여사 된다
대학 다니던 아들에게 수없이
되뇌던 속슴허라
정권이 바뀌어도
속슴허라
세상이 바뀌었다고
아버지! 이제 고라도 될 건디 예!
이제 말해도 괜찮은 세상이라 해도
속슴허라
속슴허라
평생을 가슴앓이하다가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 양동림 시집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 (한그루, 2021)에서
* 늦가을의 정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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