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에서 온 인형
웃자란 포만감을 갖고 노는
울음소리가 없는 오늘은
욕조 속 한 점 호흡이 사라진 하늘을 여닫네
욕조 밖은 낯선 바다
오래 웅크려 잠든 너를 깨웠을 텐데
얼굴을 만져 볼 수 없는
어딘가 신의 흔적이 있을 거야
시퍼런 들물과 날물의 어디쯤
쉽게 부러지는 흰 국화꽃
숨 쉬지 않는 수평선을 열고
물살을 넘기지 못하고 헐떡이는
몸을 내밀어봐
맡겨진 물빛 생이 아픈
더듬더듬 여린 말문에 아가미가 돋아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눈물 같은 비가 내리기를
네가 웃고 있다
네 이름마저 굳어버려
끊겼다 이어지던 가벼운 인사
물 안에서 계속 멀어지는 서늘한 입맞춤
♧ 마블링의 쓸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반씩 섞여 있다
눈물이 나는 대리석 무늬 균일한 감정은 오래된 성역,
한번 맛본 식감을 맹신하는 잎, 가장 슬펐을 때 붉어지는 기억,
사방에서 밀려드는 낯선 체온,
오빠를 하늘로 날려 보내고 퍽퍽한 슬픔만 골라 먹는 엄마
선명할수록 걸쭉해지는 통증들
신神을 바라다본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잘 지내고 있는지, 매일 아침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앞뒷면이 같은 통증
♧ 가슴에는 새가 산다
피고 지는 것들은 무엇을 부러워했을까
사선을 그으며 건너가는 눈먼 활공
실핏줄마다 금이 간 투명한 유리벽
깃을 치며 비스듬히 날아가는 새 떼들
허공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건 오래된 처세술
투신하는 족족 명중이다
고층 빌딩은 종종 윈도스트라이크*
사선으로 흐르는 공중 무덤
날이 바짝 선 바람칼의 회전
트랙을 따라 도는 빈 하늘
투명한 족적足跡을 밝히는 격자무늬 조등弔燈
상주도 영정도 없는 장례식장
새털에 실린 부음이 허공을 질러온다
휘청거리는 아파트 공중에서도
가슴에는 새가 산다
---
*윈도스트라이크 : 건물 유리창, 투명 방음벽에 새들이 부딪쳐 죽는 현상.
♧ 뒤에 오는 것들은 가장 치열하다
맨은 앞에 서 있을 때가
가장 단단하다
밤새워 잰걸음 걷던 맨발
어금니를 꽉 물던 맨주먹
살면서 칼날에 베어져 힘줄 붉은 맨살
겉치레가 빠져 맨 끝까지 내려간 생生의 민낯을
모두 봐버린 맨바닥까지
잔뼈가 굵은 맨몸은 삶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뿌리를 드러낸 맨바닥은 맨바닥끼리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근육을 키워 나가고
맨 처음처럼 설레고
가장 오래 남는 그리움의 보폭을 끌고
맨 뒤에 오는 것들은 가장 치열하게 사는 것들이다
♧ 괄호를 열고 물망物望을 닫고
겨울이 가고 또 겨울이 오네
뒤집힌 이파리들의 점복占卜 떠도는 실마리가 풀렸는지 모르겠네
물망에 오른 여러 개의 바람이 시야를 좁혀오고
본디 골 중에서 가장 깊은 감정의 기로에 선 풍경들이 파릇해진 당신을 겨냥하고
비포장길인 말의 뼛속 사이를 오가느라 희끗희끗 아는 이름들이 술렁이네
속말은 혀의 안쪽, 뒤쪽 두 곳에 마음을 두고 두리번거리네
아프다 아프다 해도 허투루 피는 이름은 없으니
어느 날부터 실명을 밝히며 일어서는데 이번엔 나인가 당신인가
이제 막 뚜껑을 열었는데 당신은 뒤섞여 피고 공손하게 마주 앉은 채 여전히 속없이 웃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봉분마다 아직 오지 않은 봄날에 밑줄 치고 진눈깨비처럼 가벼운 이름만 흩날리네
혼자 서지 못하는 갈등은 무거운 이름,
이 생각 저 생각 공회전 되는 습성처럼 남을 의지해 일어서고 감기며 올라서네
*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 (리토피아, 2021)에서
* 사진 : 가야산국립공원의 가을빛(수채화 효과)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월문학' 2021년 제12호의 시(2) (0) | 2021.11.24 |
---|---|
김경훈 시집 '수선화 밭에서'의 시(4) (0) | 2021.11.23 |
양동림, 시집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 발간 (0) | 2021.11.21 |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발간 (0) | 2021.11.20 |
강문신 시조집 '해동의 들녘'에서(6) (0) | 2021.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