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의 시(2)

김창집 2021. 11. 22. 00:22

물에서 온 인형

 

웃자란 포만감을 갖고 노는

울음소리가 없는 오늘은

욕조 속 한 점 호흡이 사라진 하늘을 여닫네

 

욕조 밖은 낯선 바다

오래 웅크려 잠든 너를 깨웠을 텐데

얼굴을 만져 볼 수 없는

어딘가 신의 흔적이 있을 거야

 

시퍼런 들물과 날물의 어디쯤

쉽게 부러지는 흰 국화꽃

숨 쉬지 않는 수평선을 열고

물살을 넘기지 못하고 헐떡이는

 

몸을 내밀어봐

맡겨진 물빛 생이 아픈

더듬더듬 여린 말문에 아가미가 돋아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눈물 같은 비가 내리기를

 

네가 웃고 있다

네 이름마저 굳어버려

끊겼다 이어지던 가벼운 인사

물 안에서 계속 멀어지는 서늘한 입맞춤

 

마블링의 쓸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반씩 섞여 있다

 

눈물이 나는 대리석 무늬 균일한 감정은 오래된 성역,

 

한번 맛본 식감을 맹신하는 잎, 가장 슬펐을 때 붉어지는 기억,

 

사방에서 밀려드는 낯선 체온,

 

오빠를 하늘로 날려 보내고 퍽퍽한 슬픔만 골라 먹는 엄마

 

선명할수록 걸쭉해지는 통증들

 

을 바라다본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잘 지내고 있는지, 매일 아침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앞뒷면이 같은 통증

 

가슴에는 새가 산다

 

피고 지는 것들은 무엇을 부러워했을까

사선을 그으며 건너가는 눈먼 활공

실핏줄마다 금이 간 투명한 유리벽

깃을 치며 비스듬히 날아가는 새 떼들

허공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건 오래된 처세술

투신하는 족족 명중이다

고층 빌딩은 종종 윈도스트라이크*

사선으로 흐르는 공중 무덤

날이 바짝 선 바람칼의 회전

트랙을 따라 도는 빈 하늘

투명한 족적足跡을 밝히는 격자무늬 조등弔燈

상주도 영정도 없는 장례식장

새털에 실린 부음이 허공을 질러온다

휘청거리는 아파트 공중에서도

가슴에는 새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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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스트라이크 : 건물 유리창, 투명 방음벽에 새들이 부딪쳐 죽는 현상.

 

뒤에 오는 것들은 가장 치열하다

 

맨은 앞에 서 있을 때가

가장 단단하다

 

밤새워 잰걸음 걷던 맨발

어금니를 꽉 물던 맨주먹

살면서 칼날에 베어져 힘줄 붉은 맨살

겉치레가 빠져 맨 끝까지 내려간 생의 민낯을

모두 봐버린 맨바닥까지

 

잔뼈가 굵은 맨몸은 삶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뿌리를 드러낸 맨바닥은 맨바닥끼리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근육을 키워 나가고

 

맨 처음처럼 설레고

가장 오래 남는 그리움의 보폭을 끌고

 

맨 뒤에 오는 것들은 가장 치열하게 사는 것들이다

 

괄호를 열고 물망物望을 닫고

 

겨울이 가고 또 겨울이 오네

 

뒤집힌 이파리들의 점복占卜 떠도는 실마리가 풀렸는지 모르겠네

 

물망에 오른 여러 개의 바람이 시야를 좁혀오고

 

본디 골 중에서 가장 깊은 감정의 기로에 선 풍경들이 파릇해진 당신을 겨냥하고

 

비포장길인 말의 뼛속 사이를 오가느라 희끗희끗 아는 이름들이 술렁이네

 

속말은 혀의 안쪽, 뒤쪽 두 곳에 마음을 두고 두리번거리네

 

아프다 아프다 해도 허투루 피는 이름은 없으니

 

어느 날부터 실명을 밝히며 일어서는데 이번엔 나인가 당신인가

 

이제 막 뚜껑을 열었는데 당신은 뒤섞여 피고 공손하게 마주 앉은 채 여전히 속없이 웃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봉분마다 아직 오지 않은 봄날에 밑줄 치고 진눈깨비처럼 가벼운 이름만 흩날리네

 

혼자 서지 못하는 갈등은 무거운 이름,

 

이 생각 저 생각 공회전 되는 습성처럼 남을 의지해 일어서고 감기며 올라서네

 

 

                                   *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리토피아, 2021)에서

                                      * 사진 : 가야산국립공원의 가을빛(수채화 효과)